사라지는 한라산의 4·3 유적들
2021년 04월 27일(화) 08:00
4월 어느 날 제주의 연구자 및 시민사회 선생님들 사이에 끼여서 제주 유적지 조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한라산 주변에는 제주 4·3 당시의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이 중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경찰의 수악주둔소 정도이다.

제주에서는 4·3 관련 유적들에 대한 기초조사를 4·3 진상보고서 발간 즈음과 그 이후 실시했다. 하지만 현재 제주의 급속한 개발로 인해 유적지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 무장대, 토벌대의 초소들, 군 숙영지,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들은 곳곳에 남아 있지만, 아직은 문화재의 틀 안에서 보호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잃어버린 마을의 터들도 개발로 인해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제주의 난개발은 자연만을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4·3 역사도 지워 가고 있다. 그래서 제주의 뜻있는 연구자 선생님들께서 4·3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를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계셨다.

제주에 연고가 없는 외지인으로 제주를 사랑해 즐겨 찾긴 하지만, 항상 마음 한 편에는 4·3의 역사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내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는 이곳이 학살터라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던 곳이라면, 결코 감출 수 없는 죄책감이 항상 마음 한 편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장대와 토벌대의 격전지이자 제주 도민들의 피란 터였던 관음사와 아미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4·3의 역사는 잔학한 학살과 고통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치열한 전투 그리고 이곳에서 사람이 삶을 버텨 온 빛나는 승리의 역사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국가가, 본연의 책임을 저버리고 외세와 결탁하여 민(民)을 적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조차, 사람들은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국가에서 정당한 사과를 받아 내기까지 했다.

최근 해외의 트라우마 연구에서는 ‘도덕적 손상’(moral injury)이란 개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인간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참상에 대해 책임 있는 자들이 충분한 책임을 지지 않았을 때 이에 연루된 이들은 책임 있는 자의 배신으로 인해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이때 촉발된 수치심과 모멸감 등 도덕적 감정의 훼손이 다시 자살 및 살인 등 폭력적 행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제주의 민(民)들은 국가가 자신들을 버리고 적으로 삼았을 때 엄청난 배신감·상실감·모멸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분노는 삶을 포기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싶은 정도로 불타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주의 4·3 유적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흔적은 이들이 자연과 제주의 각종 구조물들을 지혜롭게 이용하며 삶을 이어 갔음을 말해 준다. 무덤 터 옆의 지형을 이용하여 무장대의 초소를 만들기도 했고, 4·3 이후 마땅한 생계가 없던 제주의 사람들은 한라산 중턱에서 산감의 눈을 피해 숯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만든 숯을 한라산 700고지에서 동문시장까지 지고 가 억척스레 생활을 했다. 조선시대 이래 말 목장 관리를 위해 만들어 낸 산담(토성)을 이용해 무장대는 전투를 했고, 군 숙영지 역시 제주의 머들(돌무더기)을 가져다 조성하였다. 적이 되어 격렬하게 싸우거나 혹은 이 틈바구니에서 삶을 이어 가거나, 사람들은 모두 한라산의 지형·지세·인공구조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기실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의 태반은 치열한 싸움 이야기와 그리고 그 안에서의 처절하지만 숭고한 삶의 이야기들이다. 국가가 사람들을 버렸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엄청난 충격 속에서 살았겠지만, 삶을 이어 가기 위해 온갖 지혜를 발휘했다. 어쩌면 한라산이 이들을 품어 주었기에 엄청난 참상 이후에도 사람들의 회복력(resilience)이 가능했을 듯하다.

그런데 지금 제주의 난개발로 인해 한라산의 귀한 역사는 사라져 가고 있다. 조선 시대 이래 동물의 이동을 막기 위한 잣담(성벽처럼 쌓은 돌담)도, 4·3의 역사의 각종 유적지들도, 한라산 주변의 난개발과 더불어 흔적이 멸실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삶의 역사를 문화재로 혹은 ‘공공 역사’(public history)로 후대에 남기기 위해 체계적인 조사와 적극적인 관리 방법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한라산과 한라산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주윤정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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