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연 조선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교수] 음악이 위로가 될 때
2021년 03월 10일(수) 23:30
1994년 개봉된 영화 ‘쇼생크 탈출’에 교도소 내의 특수 보직을 맡게 된 주인공이 방문을 걸어 잠근 채 교도소 전체에 모차르트의 오페라 2중창을 방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감자들은 모차르트를 알건 모르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정적 속에서 듣고만 있다. 그리고 한 죄수의 독백이 흐른다. “이 두 이탈리아 여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때로는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지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우리는 짧았던 그 순간 모두 자유를 느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초기, 통째로 자가격리된 이탈리아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각자의 발코니에 나와 서로 멀리 떨어진 채로 냄비와 그릇을 악기 삼아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매체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가로로 긴 아파트 구조 탓에 서로 얼굴도 잘 보지 못하고 대체 내가 누구와 춤추고 노래하는지 알 수 없지만, 화음을 맞추고 장단을 맞추며 험난한 시절을 잠시라도 잊게 한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난 후,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했다고 해서 바로 개선되는 현실이란 별반 없다. 교도소에서 탈출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팬데믹의 위험이 덜어질 리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견뎌야 할 지독한 시간’이라는 것이 총량 법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시간을 치유하거나 대면할 용기, 정화할 여지를 음악을 통해 넘볼 수는 있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18세기에 대유행한 감염병으로 인해 스무 명의 자녀 중 절반을 잃었다. 바흐는 고통에 직면해 칸타타 ‘제 몸은 성한 곳 없고, 작품번호 25’를 작곡한다. ‘모든 세상이 병상이다. 누가 고통에 있는 나를 치유하며 나를 회복시킬까’ 등의 테너 독백을 통해 시대가 처한 감염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프랑스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는 1918년 스페인에 닥친 팬데믹을 겪는 도중, 도처에 쌓여 가는 시체의 참혹함을 목격하고 ‘플룻, 오보에,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4중주, 작품번호 47’을 작곡하여 희생자를 추모했다. 각 악기들이 수많은 임시표를 고통스레 쌓아 올리며 얽혀가는 구조가 흡사 그들이 겪은 참담했던 시기와도 같다. 마지막 악장에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강렬함 대신 장송비가를 배치하여 그가 전하려는 음악적 치유의 기능을 마주하게 한다.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한다. 공포로 얼룩진 삶을 연명하던 그는 연필과 종이를 어렵게 얻어내 8악장의 대작을 작곡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이다. 1941년 1월 피아노를 맡은 메시앙은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는 세 명의 수용소 동료들과 함께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안고 있는 5000명의 수용자 앞에서 이 작품을 초연한다. 모두 포로 신세인 네 명의 연주자와 5000명의 수용자들이, 죽고 사는 것이 1분 1초 불안했을 전쟁터 수용소에서 일으켜낸 기적. 절망으로 잠식되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듯 탄생한 이 작품은 존재 자체로 경이로움을 넘어선다.

이렇듯 음악은 우리의 위기 상황에서 ‘반응과 작용’을 한다. 닥쳐온 위기 속에서 고통을 외치건, 치유를 건네건, 희망을 갖겠다고 선언을 하건. 그것이 감염병이나 전쟁 같은 거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밤마다 진지하게 울어대는 갓난아기에게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의 평안함조차 음악의, 예술의 작용이다.

음악의 사전적 풀이는 이렇다.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 수많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혼돈 속에서 우리가 사상과 감정의 소통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지 아닌지 귀하에게 묻고 싶다. 아, 물론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서 묻고 싶다. 과연, 시절 좋을 때 하는 것이 예술인가? 시절 좋을 때와 시절 나쁠 때, 우리에게는 언제 더 예술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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