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
2021년 03월 10일(수) 09:00 가가
아내와 함께 미용실에 갔을 때 손님이라곤 우리뿐이었다. 아내의 머리를 자르고 난 뒤 원장님은 가운을 입은 내 머리에 물을 분사했다. 그이는 젖은 내 머리칼을 이리저리 뒤섞은 다음 손가락을 빗처럼 벌려 빗겨 주었다. 갑작스레 어머니의 손길이 생각났다. 왜 아니겠는가. 옷에 코를 묻히고 다니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세수하기 싫어하는 나를 잡아 앉히고는 목에다 수건을 두른 뒤 손바닥으로 세숫대야의 물을 떠 얼굴을 죽죽 문지르시곤 했다. 어머니라니. 끝이라고 여겼던 광경 뒤에 보태져 더 큰 그리움으로 변하는 세월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이는 이내 촉촉이 젖은 머리칼을 자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분의 손이 뒷머리로 돌아가 멈추더니 머리칼이 들썩인 다음 무언가 딱딱한 게 닿았다. 궁금해진 나는 뒷머리를 힐끔거렸다. 아, 빗이… 머리에 가로로 고정돼 있었다. 그분은 내 마스크 끈에 빗을 끼어 틈을 만들고 그 틈에 가위를 넣고 머리를 자르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커트 때 실수로 내 마스크 끈을 자르고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던 원장님. 많은 생각 끝에 그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이상하게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집콕이거나, 마스크를 반드시 쓰고 외출해야만 하는 코로나의 악몽에서 숨구멍이 트인 기분이랄까. 희망이 시작된 듯한 설렘 같은 것. 모두가 상처를 품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를 쉬게 하는 귀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새벽 배송기사를 위해 현관문에 감사의 쪽지를 써놓은 고객. 자신의 텅 빈 가게를 나가며 마음 아파하던 손님이 마찬가지로 인적이 없는 옆집 가게의 떡을 사 건네며 힘내라고 말할 때 울고 말았다는 자영업인. 그리고 가게 앞을 서성이는, 입성 허름한 형제를 불러 치킨을 주고 돈을 받지 않은 치킨집 사장님에게 전국에서 ‘돈쭐’을 내겠다며 주문과 선물이 폭주했다는 이야기. 형제 중 소년가장 형은 식당 알바를 하다 코로나로 해고된 상태였다. 사장님은 그 뒤에도 찾아온 일곱 살짜리 동생에게 몇 번이나 치킨을 먹였다고 한다. 이분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이 그립고 그리운 시절이다.
능력자들이 이분들을 닮았으면 좋겠다. 머리 말고 가슴으로. 그들 모두 가슴으로 고통을 느끼면 좋겠다. 형이 확정되지도 않은 사람들을 두고 ‘사면’ 이야기를 꺼내거나 재난지원금 지급을 두고 부러 논쟁을 만드는 사람들. 자신들은 다른 경우라며 편을 갈라 우기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 재해로 죽은 아들을 기리며 단식을 하는 엄마에게 문자로 출입금지를 통보한 국회의 처사 같은 슬픈 일들. 우리 곁에 없었으면 좋겠다. 머리가 영리하면 좋은 대학을 나와 국가고시에 합격하거나 자격증을 따 사회의 주류가 되기에 십상이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능력주의자로 변한다. 그러나 가슴이 없는 능력주의자들은 기쁨이나 슬픔을 알지 못한다. 고통이야말로 그 감정들의 바로미터이니까. 갱도에서, 어선에서, 윈도 스크린 앞에서 컵라면을 먹어 봐야 생의 찬란한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그가 좋아하는 화가인 쥘 브르통을 보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에서 프랑스 북부까지 왕복 240㎞의 길을 걸었다. 단돈 10프랑만으로.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구두를 그렸다. ‘구두’라는 그림이다. 한쪽 목은 꺾인 채 구부러졌고 다른 쪽은 휘어져 버린 구두. 끈을 품었던 구멍은 뻥 뚫려 있다. 하이데거는 이 낡고 해진 구두를 통해 구두를 신은 사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표피보다 내부의 상처와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시국이다. 그런 사람이 세상의 중심에 서야 한다.
하위 50%가 부의 1.8%만을 갖는 한국 사회. 100칸짜리 설국열차라고 한다면 꼬리 두 칸에 하위 50%가 내몰려 있는 형국이다. 능력이 훌륭한 사람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필요한 이유다. 뜬금없이 어머니의 손길을 떠올린 것도 그런 조바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질과 종교와 선진의 허영들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이 코로나의 지난한 대열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빈센트 반 고흐는 그가 좋아하는 화가인 쥘 브르통을 보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에서 프랑스 북부까지 왕복 240㎞의 길을 걸었다. 단돈 10프랑만으로.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구두를 그렸다. ‘구두’라는 그림이다. 한쪽 목은 꺾인 채 구부러졌고 다른 쪽은 휘어져 버린 구두. 끈을 품었던 구멍은 뻥 뚫려 있다. 하이데거는 이 낡고 해진 구두를 통해 구두를 신은 사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표피보다 내부의 상처와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시국이다. 그런 사람이 세상의 중심에 서야 한다.
하위 50%가 부의 1.8%만을 갖는 한국 사회. 100칸짜리 설국열차라고 한다면 꼬리 두 칸에 하위 50%가 내몰려 있는 형국이다. 능력이 훌륭한 사람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필요한 이유다. 뜬금없이 어머니의 손길을 떠올린 것도 그런 조바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질과 종교와 선진의 허영들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이 코로나의 지난한 대열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