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진 상지대 명예교수·다산연구소이사] 민중의 마음을 엿보다 - 삼국지 읽기
2021년 02월 23일(화) 09:00 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국지의 작가로 나관중(羅貫中)을 떠올린다. 그리고 책권이나 읽었다는 사람이면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의 작가가 진수(陳壽)이고,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작가는 나관중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나관중은 ‘연의’의 창작자라기보다 편찬자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연의가 한 사람의 손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唐)나라 때부터 야담(野談) 형식의 삼국지가 유행했고, 송(宋)대에는 직업적인 이야기꾼들의 화본(話本) 속에 섞여 있었으니 그것이 이른바 화본소설이다. 그 뒤 평화소설로, 장회소설(章回小說)로 연의의 틀이 갖추어졌다. 말하자면 연의는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裵松志)의 주(注)에 수집된 야사(野史)와 잡기(雜記), 화본소설과 평화소설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연의의 초기 판본은 가정(嘉靖) 원년(1522년)에 출간된 ‘삼국지통속연의’이다. 이를 명(明)나라 말기 이탁오(李卓吾)가 나관중본과 통속 연의를 통합·정리하였고, 청(淸)나라 모종강(毛宗崗) 부자(父子)가 앞선 판본들을 모아 손질함으로써 그 예술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당대의 일급 문장가들인 이탁오와 모종강 부자가 나관중본을 바탕으로 여러 판본을 통합·정리하여 줄거리가 탄탄한 연의체 소설로 탄생시킨 것이다. 우리가 읽었던 ‘삼국지연의’는 거의 모종강본인데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으로 중국 3대 기서(奇書: 삼국지·수호지·홍루몽)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연의에 등장하는 인물이 줄잡아 400여 명, 중요 인물은 300여 명이며 핵심 인물만도 100여 명이다. 실로 엄청난 인적 자원이며 스케일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활약상을 평가하는 데 인용한 시편(詩篇)만도 205여 편으로, 어떠한 선택이 역사에 부합하는 올바른 인간형인가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배경 자료로 이용했다. 청대(淸代)의 장학성(章學成)이 “연의는 7할은 사실이고 3할은 허구여서 읽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힌다”라고 지적하였듯이 소설적 흥미를 북돋우기 위해 가공된 사실도 끼워 넣었다. 그뿐이 아니다. 주자(朱子)의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빌려와 유비(劉備)를 주인공으로 조조(曹操)는 교활하고 잔인한 통치자로 전락시켰다.
연의와 달리 서진(西晉)의 진수가 쓴 ‘삼국지’는 후한(後漢) 때 위(魏)·오(吳)·촉(蜀)의 60년 역사를 기술한 정사(正史)이다. 그는 여기에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지상에는 두 임금이 존재할 수 없다’(天無二日, 地無二王)는 정통론(正統論)을 제시하였다. 정통론이란 천하에 임금이 둘일 때 누구를 적통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다. 사실 정통론은 중국의 역대 사가(史家)들에게 일대 논쟁을 일으킨 사관(史觀)으로, 훗날 동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굴종을 강제하게 되는 역사관이기도 하다.
천하를 통일한 왕조는 자동으로 정통에 속하지만 여러 개의 정권이 동시에 등장할 때는 적통을 결정하기가 난감한 게 현실이다. 근대 계몽기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는 “‘천하에는 하루도 군주가 없을 수 없고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병존(竝存)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주장 때문에 정통론이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었고, 이는 특정한 나라에 정통을 주려는 데서 생긴 결과다”라는 비판적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중세사회에서 왕조 본위의 역사 기술상 정통론은 역사 기술의 기준 즉 기년(紀年)을 세우기 위해서도 불가피했지만, 그보다는 자기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정통론의 도입이 절실했었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진수는 조조(曹操)를 정통으로 인정하였고, 나관중은 유비(劉備)를 정통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중국 고전 읽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으니 정통론은 중국 중심주의에서 출발한 세계관임을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고착되어 중국 이외의 민족들을 오랑캐로 멸시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넣으려는 이념적 틀로 작동하였다. 정통론은 안으로는 자기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의 실천이며 밖으로는 강력한 중국 중심주의 세계관의 구축이다. ‘천하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중국 자신의 역사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황제(皇帝)를 주변 국가들도 받들고 섬겨야 한다는 지배의식의 강화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것이 중국 역대 사가(史家)들의 머릿속에 숨어 있는 정통론의 본얼굴이다.
‘젊어서는 수호지를,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어서는 안 된다’(少不讀水滸, 老不看三國)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연의가 가진 엄청난 문학적 흡입력을 설명한 구호인 바, 삼국지연의는 그러한 책이다.
연의와 달리 서진(西晉)의 진수가 쓴 ‘삼국지’는 후한(後漢) 때 위(魏)·오(吳)·촉(蜀)의 60년 역사를 기술한 정사(正史)이다. 그는 여기에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지상에는 두 임금이 존재할 수 없다’(天無二日, 地無二王)는 정통론(正統論)을 제시하였다. 정통론이란 천하에 임금이 둘일 때 누구를 적통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다. 사실 정통론은 중국의 역대 사가(史家)들에게 일대 논쟁을 일으킨 사관(史觀)으로, 훗날 동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굴종을 강제하게 되는 역사관이기도 하다.
천하를 통일한 왕조는 자동으로 정통에 속하지만 여러 개의 정권이 동시에 등장할 때는 적통을 결정하기가 난감한 게 현실이다. 근대 계몽기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는 “‘천하에는 하루도 군주가 없을 수 없고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병존(竝存)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주장 때문에 정통론이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었고, 이는 특정한 나라에 정통을 주려는 데서 생긴 결과다”라는 비판적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중세사회에서 왕조 본위의 역사 기술상 정통론은 역사 기술의 기준 즉 기년(紀年)을 세우기 위해서도 불가피했지만, 그보다는 자기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정통론의 도입이 절실했었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진수는 조조(曹操)를 정통으로 인정하였고, 나관중은 유비(劉備)를 정통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중국 고전 읽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으니 정통론은 중국 중심주의에서 출발한 세계관임을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고착되어 중국 이외의 민족들을 오랑캐로 멸시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넣으려는 이념적 틀로 작동하였다. 정통론은 안으로는 자기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의 실천이며 밖으로는 강력한 중국 중심주의 세계관의 구축이다. ‘천하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중국 자신의 역사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황제(皇帝)를 주변 국가들도 받들고 섬겨야 한다는 지배의식의 강화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것이 중국 역대 사가(史家)들의 머릿속에 숨어 있는 정통론의 본얼굴이다.
‘젊어서는 수호지를,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어서는 안 된다’(少不讀水滸, 老不看三國)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연의가 가진 엄청난 문학적 흡입력을 설명한 구호인 바, 삼국지연의는 그러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