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영 광주시민인문학 대표·문학박사] ‘성장 드라마’로 변한 영화 ‘조제’
2021년 02월 01일(월) 07:00
김종관 감독의 ‘조제’(2020)를 보기 위해 날을 잡았다. 지인들의 스케줄에 맞춰 금요일 심야에 영화관을 찾았다. 코로나 시국이라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방역 지침에 따라 거리를 두고 앉아, 천천히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궁금해 하던 한국인 감독표 ‘조제’를 만났다.

‘조제’는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1985)에서 모티프를 차용해 각색한 리메이크 작품이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로 이미 익숙하다.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든 의문점은 일단 이야기가 장애인 구미코(닉네임 조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김종관표 ‘조제’의 결말은 사랑하고 난 후 성장한 여인이 우정을 향유하며 자동차를 운전하는, 마치 비장애인의 삶을 흉내 내는 듯한 조제를 밝은 터치로 클로즈업한다.

그렇다면 영화 ‘조제’는 원작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타이틀이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 ‘조제’로 바뀐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작품이 추구하는 주제가 다르다. 결론부터 말해, 소설은 조제를 ‘의연’한 인물로 그렸지만, 영화는 장애인의 ‘성장 드라마’로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원제의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갖는 의미가 영화에서는 생략된다. ‘호랑이’가 의미하는 바는, 구미코가 동물원 호랑이를 보고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하는 대사에서 드러난다. 장애인으로 갇혀 지내지만 책을 통해 넓은 세상을 상상하고 조형해 왔을 그녀. 당당함의 원천이라고도 볼 수 있는 독서량은 이미 조제만의 철학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 구미코가 사강의 러브스토리 소설을 읽으며 상상하고 희망했을 ‘연인’의 존재 이유를 피력하는 대목이다. 여성이면서 장애인이라는 이중의 사회적 장벽을 넘을 수 있도록, 의지하고, 보호받고 싶은 나이브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물고기들’의 연출로, 조제가 남친 츠네오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물고기 조형물을 보고 선택한 숙소에서 조제는 자신이 살았던 해저에 대해 언급한다.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와. 정적만 있을 뿐이지” “외로웠겠다!” “별로 외롭지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어쩌면 삶이란, 조제가 통찰한 ‘바람도 비도 빛조차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지 않을까. 마치 죽음과도 같은….

이즈음 조제는 츠네오의 마음이 변했음을 예감한다.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이 있을 뿐이지”하고 생각한다. 이처럼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는 성장이 아닌 의연함을 말하고 있다. 장애인 여성이라는 약자적 경험에서 느낀 깨달음이 달관과 체념의 경지를 터득하게 한 것이다.

흔히 욕망을 이루기 위해 난관을 극복하고 우뚝 서면,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욕망’에는 두 가지의 철학적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플라톤에서 라캉에 이르기까지 견지되는, ‘욕망은 결핍으로부터 탄생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욕망은 생산으로서의 욕망이다’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시각이다. 이 중 우리(한국의 정서)는 전자의 관점에 서서, 원하던 것(결핍)을 이루면 성장(=being)했다고들 평가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일본인들의 철학은 후자로, 욕망은 결핍의 충족이 아니라, 오히려 ‘되기’(becoming)이다. 사회뿐만 아니라 사랑의 관계에서 조차도 약자이지만, 이를 이겨낸 상태를 성장이라 하지 않고, 그러한 삶을 예감하고 수용하는 의연한 태도의 생성에 더 가치를 둔다는 것. 이 영화의 주제가 ‘성장’이 아닌 ‘의연함’이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과연 인간은 ‘성장’하는 유기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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