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과 상에 대한 단상 - 황옥주 수필가
2021년 01월 06일(수) 23:00 가가
미국의 켄 블랜차드가 쓰고 조천제 씨가 번역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때가 있었다. ‘칭찬’이란 용어 때문에 교육 현장에선 더 그랬다. 칭찬의 효과는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고래의 실험이 그랬으니까, 식물들도 긍정적으로 반응했다고 해서 사람들도 그러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인간의 사고는 복잡하고 이중성까지 내장되어 있어 단순 비교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무렵 감동 속에 읽었던 또 하나의 책이 김정모 씨가 엮은 ‘부모의 길 자녀의 길’이다. 몇 분이 쓴 것인데 글마다 시사하는 바가 컸다. 특히 김정모 씨의 글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어느 여인이 유복자 아들을 낳아 애틋한 마음 하나로 길렀다. 기를 살리려 오로지 칭찬 일변도로 감쌌다. 무슨 일을 저지르든 무조건 “잘했다”가 어머니의 소신이고 잣대였다. 누군가를 때리고 들어오면 “아이고 내 새끼 씩씩도 하지”로 일관했다. 끝내는 불량배가 되고 살인을 저질러 사형 언도를 받았다.
재판관이 마지막 소원을 묻자 어머니를 한번 뵙고 싶어 했다. 수갑을 찬 아들을 본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눈물 젖은 가슴으로 포옹한 순간에 아들은 엄마의 귀를 물어뜯으며 “엄마가 나를 죽였어요”하고 절규했다는 가슴 아픈 얘기다.
공자님은 영혼 없는 칭찬은 좋게 보지 않으셨다. 논어 위령공편에 적혀 있다. “내가 사람에 대해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만일 칭찬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시험하는 바가 있어서 일 것이니라”는 말씀이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혼이 실리지 않은 칭찬은 칭찬이 될 수 없다.
연말연시에 들어서면 여러 문학 단체의 갖가지 행사가 열리고 많은 상들이 주어진다. 세속을 초탈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을 받아 즐겁지 않은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아닌 척 해도 사람의 내심은 다 거기서 거기다. 듣기 좋은 칭찬의 소리가 사방에 날린다. 그 속에는 진정을 담은 칭찬이 있는 반면,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한 빈말의 칭찬도 많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면 인간은 배가 아파진다. 몰라도 좋을 심상까지를 선인들은 속담으로 남겨 놓았다.
상은 칭찬의 유사종이다. 칭찬의 속내가 가지가지인 만큼 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찍이 신석정 씨는 “도시 상이란 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인데 ‘받아야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문단 풍조를 개탄했고, 이어령 씨는 “사십이 넘고서도 상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폄하했다. 수필가 고 윤모촌 씨 글에는 더 적나라한 비판도 있다.
어느 수필가는 오늘의 우리 문단을 ‘삼다 삼무’로 진단했다. 그 삼다 중의 하나가 ‘상이 많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든 칭찬과 상이 꼭 춘추사관을 지향한 공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생각은 해볼 일이다. 상은 대의명분에 의한 포폄(褒貶)이어야 한다고 본다.
고래도 춤춘다니까 칭찬과 상(동물이라면 먹이)은 필요한 요소이지만 고민 없이 주어진 것이라면 어색스럽고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면 아무리 이름 있는 상이라도 헛되고 덧없다. 좋은 옷일수록 몸에 어울려야 빛이 나는 법이다.
때문에 상은 새로운 멍에, 벗기 어려운 짐이 될 수가 있다. 남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수상자로서의 위상도 함께 추락한다. 항용유회(亢龍有悔)다. 앞으로 떨어질 일밖에 없을 때, 용은 너무 높이 올라왔음을 후회한다.
존경받는 수필가가 어느 수상식에서 하신 말씀을 영 잊을 수 없다. 문인들이 자기의 대표작으로 등단할 때의 작품을 들먹일 때는 서글퍼진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글을 써 왔는데 그 노력이 헛된 것 아니냐는 겸손의 말씀이지만 자만하기 쉬운 사람들을 흔드는 교훈이다.
노력은 값지다. 좋은 글을 쓰고자 밤을 새우는 의욕은 더 값지다. 그런 의미에서 상은 격려임과 동시에 분발의 유인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목적이 상이라면 부질없는 일이다. 연마와 자기 성찰은 보람된 삶 속으로 끌고 가는 수레의 양 바퀴란 걸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고래의 실험이 그랬으니까, 식물들도 긍정적으로 반응했다고 해서 사람들도 그러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인간의 사고는 복잡하고 이중성까지 내장되어 있어 단순 비교가 어렵기 때문이다.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어느 여인이 유복자 아들을 낳아 애틋한 마음 하나로 길렀다. 기를 살리려 오로지 칭찬 일변도로 감쌌다. 무슨 일을 저지르든 무조건 “잘했다”가 어머니의 소신이고 잣대였다. 누군가를 때리고 들어오면 “아이고 내 새끼 씩씩도 하지”로 일관했다. 끝내는 불량배가 되고 살인을 저질러 사형 언도를 받았다.
연말연시에 들어서면 여러 문학 단체의 갖가지 행사가 열리고 많은 상들이 주어진다. 세속을 초탈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을 받아 즐겁지 않은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아닌 척 해도 사람의 내심은 다 거기서 거기다. 듣기 좋은 칭찬의 소리가 사방에 날린다. 그 속에는 진정을 담은 칭찬이 있는 반면,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한 빈말의 칭찬도 많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면 인간은 배가 아파진다. 몰라도 좋을 심상까지를 선인들은 속담으로 남겨 놓았다.
상은 칭찬의 유사종이다. 칭찬의 속내가 가지가지인 만큼 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찍이 신석정 씨는 “도시 상이란 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인데 ‘받아야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문단 풍조를 개탄했고, 이어령 씨는 “사십이 넘고서도 상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폄하했다. 수필가 고 윤모촌 씨 글에는 더 적나라한 비판도 있다.
어느 수필가는 오늘의 우리 문단을 ‘삼다 삼무’로 진단했다. 그 삼다 중의 하나가 ‘상이 많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든 칭찬과 상이 꼭 춘추사관을 지향한 공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생각은 해볼 일이다. 상은 대의명분에 의한 포폄(褒貶)이어야 한다고 본다.
고래도 춤춘다니까 칭찬과 상(동물이라면 먹이)은 필요한 요소이지만 고민 없이 주어진 것이라면 어색스럽고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면 아무리 이름 있는 상이라도 헛되고 덧없다. 좋은 옷일수록 몸에 어울려야 빛이 나는 법이다.
때문에 상은 새로운 멍에, 벗기 어려운 짐이 될 수가 있다. 남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수상자로서의 위상도 함께 추락한다. 항용유회(亢龍有悔)다. 앞으로 떨어질 일밖에 없을 때, 용은 너무 높이 올라왔음을 후회한다.
존경받는 수필가가 어느 수상식에서 하신 말씀을 영 잊을 수 없다. 문인들이 자기의 대표작으로 등단할 때의 작품을 들먹일 때는 서글퍼진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글을 써 왔는데 그 노력이 헛된 것 아니냐는 겸손의 말씀이지만 자만하기 쉬운 사람들을 흔드는 교훈이다.
노력은 값지다. 좋은 글을 쓰고자 밤을 새우는 의욕은 더 값지다. 그런 의미에서 상은 격려임과 동시에 분발의 유인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목적이 상이라면 부질없는 일이다. 연마와 자기 성찰은 보람된 삶 속으로 끌고 가는 수레의 양 바퀴란 걸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