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聰明)이 몽당연필만 못하다
2020년 12월 30일(수) 07:00

김진구 일신중 교감

“1996년 12월-부모님 집에 석유(14만 원) 넣어 드림(9일), 집에 들러 부모님과 저녁 식사로 떡국 먹음(22일), 우리 가족 성당에서 9시 미사 참례 후 집에 들러 부모님과 점심·저녁 식사(25일), 아들과 집에 들러 점심 식사, 동산탕 함께 목욕 후 저녁 식사(29일), 부모님 집에 누님이 세탁기(금성 10㎏, 67만 5000원) 사 드림(31일)”

교육행정직에 근무하고 있는 한홍규 서기관이 두툼한 A4 뭉치를 가지고 왔다. 내용 좀 검토해 달란다. 편하게 말해서 자서전을 쓴 것이다. 주변에서 간혹 있는 부탁이다. 40년의 공직 생활과 가족의 대소사, 문중 이야기,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은 글이었다. 위에 인용한 일기 형식과 같은 간단한 메모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5남매의 우애와 부모님의 근황을 자주 묻고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계속 반복되었다. 오랜 세월 이렇게 기록해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금 뜨악했는데 읽을수록 그게 아니었다. 묶음으로 읽어 보니 그의 일생이 그려졌다. 자녀들과 집안 분들에게는 이런 실천적 효행기가 없을 듯 싶었다. 싱거운 것 같은데 감칠맛 나는 글이어서 읽는 사람이 자서전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글쓰기가 어려워 머뭇거린 사람에게는 자신감을 갖게 할 정도였다.

‘총명이 불여둔필’(聰明不如鈍筆)이라 했다. 아무리 명석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도 몽당연필로 서툴게 쓴 기록만 못하다는 말이다. 한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분이나 역사적인 인물 중에 속칭 메모광(狂)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에 했던 자신의 말과 글로 곤욕을 치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록된 증거로 억울함을 벗어난 경우도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의 흔적을 비용 들여 지운다는 기사도 간혹 보이지만, 자신만의 백지에 또박또박 기록해 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20년, 숫자로 기록한 학교의 정리는 이렇다. 2019년 12월 30일, 중국은 ‘우한 폐렴’ 발병을 처음 공개했으며,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환자 발생 후 ‘코로나19’로 이름을 바꿔 달고 계속 확산이 되었다. 설마 하다가 새 학기 3월을 망연자실 휴업으로 보냈다. 법정 수업일수에 쫓겨 4월 9일 처음 원격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계획한 올해 수업일수는 191일이었다. 28일간 휴업을 했고, 66일은 모든 학년이 원격 수업을 했다. 70일은 1개 학년 또는 2개 학년이 부분 등교했고, 모든 학생이 등교한 것은 41일뿐이었다. 방학을 줄여서 수업일수 177일. 1학년 신입생은 지금도 신입생 기분이며, 3학년은 떠밀려 졸업한 느낌이다.

주변에 자신의 삶을 책으로 정리한 분들이 많다. 사진을 위주로 간단한 설명과 함께 PPT로 만들기도 한다. 큰 비용 없이 개인적으로 출력해서 제본만 맡겨도 좋다. 평생교육기관이나 자치단체 프로그램에 자서전 쓰기 강좌도 눈에 띈다. 안정효는 ‘자서전을 씁시다’에서 이렇게 권유하고 있다.

“자서전이라고 하면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대단한 인물이 훈시를 하듯 자신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하찮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교훈적인 저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처럼 미미한 존재가 자서전을 써도 되는가 하고 겁을 먹기 쉽다. 자서전이란 그렇게 두려워할 개념이 아니다. 그런 경외감은 자서전의 성격이 위인전과 같다 라는 오해로부터 비롯한다 … 자서전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에서 ‘철모르는 딸’과 단 둘이 살아가는 어부의 인생살이가 ‘넓고 넓은 가회동의 대저택’에서 살아가는 ‘재벌 총수나 정치 지도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새해에도 시국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이때 자서전 쓰기를 권해본다. 주변 분들에게 안정효의 책을 새해 선물로 돌리고 함께 자서전이든 사진첩이든 만들어 보려고 한다. 내년 연말에는 원고 뭉치를 들고 만났으면 좋겠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삶이 집행 정지된 느낌이다. 이렇게라도 내면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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