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되돌아보며
2020년 12월 03일(목) 03:30

[노 영 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역병’(疫病)보다 무서운 코로나19가 창궐하지 않았다면 2020년은 한국 현대사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만큼 엄청난 사건들이 10년 주기로 일어났던 해이다. 40주기를 맞은 5·18 민주화운동 외에도 가족과 이웃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원수가 되어 싸운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다.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를 일깨워준 4·19 혁명이 환갑을 맞이했다. ‘조국 근대화’의 구호 속에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한 청년 노동자가 제 몸을 불사른 지 반백 년이다. 하지만 해일처럼 지구를 휘감은 코로나19는 이 모든 사건들을 되새길 수 없게 만들었다. 예정된 행사와 전시, 공연들이 하나둘씩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그럼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최근 일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타 지역 분들의 구술 자료를 넘겨보고 있다. 화면이나 음성 파일과 녹취록을 대조해 보고 있다. 한 개인의 구술은 장단점이 분명하다. 개인의 기억에 의존한다는 한계가 있으나, 문헌에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자료를 기본으로 하는 역사학을 ‘업’으로 삼은 입장에서는 ‘계륵’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알지 못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술은 무척 매력 있는 자료이다. 덕분에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깨우치고 있다.

지금까지 5·18 민주화운동 기간에 광주는 철저히 고립됐다고 알려졌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5월 21일 이후 광주 시내는 더 이상 국가 폭력이 저질러지지 않으며 시민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으나, 광주 외곽은 그렇지 못했다. 5월 21일 오후에 광주 시내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 외곽을 철통같이 막아섰다.

국군통합병원 부근과 같은 곳은 군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사람과 차량의 통행을 막아섰다. 그 외 지역도 사정은 비슷했다. 광주 외곽의 계엄군들에게는 많은 양의 실탄이 주어졌다. 일이 있어 군의 봉쇄선을 통과하려는 사람과 차량에는 무차별 총격이 가해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이유도 모른 채 희생됐다. 어느새 군의 봉쇄선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됐으며, 이 기간 동안 광주는 ‘육지 속의 섬’이었다.

항쟁 기간에 군이 봉쇄선을 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뚫고 광주의 소식을 외부로 알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광주의 비극을 꼭꼭 눌러 쓴 유인물을 꽁꽁 숨긴 채로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타 지역 사람들은 광주에서 전해진 유인물을 타자기로 옮기거나 손으로 베껴 쓴 뒤에 등사기로 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인물은 손에서 손으로, 때로는 컴컴한 어둠을 타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성당에서, 교회에서, 어느 자취방에서 몰래 몰래 숨죽이며 만들어낸 유인물은 그렇게 퍼져 갔다. 유인물을 받아든 타 지역 사람들은 TV나 신문에 비치는 광주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거나 거짓임을 알게 됐다. 전주에서, 대전에서, 공주에서, 서울에서, 부산에서, 심지어 경북 군위에서도 광주의 참상을 전하는 유인물이 발견됐다. ‘발 없는 말아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 헛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광주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 출신의 서울 병원 직원은 헌혈차를 끌고 나와 헌혈을 독려하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비록 타 지역은 광주와 같이 시민 항쟁으로 확산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광주를 지우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서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가졌다. 그래서 5월 27일 광주의, 광주 시민들의 항쟁이 무력 진압된 이후에도 또 다른 싸움을 함께해 갔다.

목숨을 내걸고 싸운 광주 시민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광주의 소식을 알리던 타 지역 분들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군경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연행된 사람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눈을 가린 채 끌려갔다. 그리고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지하실 바닥에서 오로지 혼자 국가 폭력에 맞서야 했다. 누구도 도와줄 사람 없이 쏟아지는 매질과 모욕을 견뎌야 했다. 단지 5·18을 알리고 광주의 아픔을 함께 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받아야 했다. 타 지역에서 5·18을 알리던 분들의 헌신과 노력, 그분들이 겪었던 고통과 희생도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40년 전 광주는 고립됐으나 결코 외롭지 않았음이 기억되기를 바란다. 지난 40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40년을 맞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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