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규직 박준성입니다
2020년 11월 27일(금) 08:50

박 준 성 청년문화허브 선임 간사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몇몇 순간에 이전에 살아 왔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때가 있다. 나에게는 ‘지역 주도형 청년 문화 일자리 지원 사업’에 참여할 때가 그랬다.

내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의 시골이다. 안동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은 원하는 과를 찾아서 광주로 오게 되었다. 스무 살에 느꼈던 광주는 낯선 도시였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고, 군대에 다녀오고,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며 인생의 3분의 1을 광주에서 보낸 뒤로는 오히려 고향이 어색해졌다. 대학원을 수료하고 나는 광주를 떠났다. 내 유일한 능력인 글쓰기를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향은 생각보다 더 낯설었다. 그렇게 백수로 살기를 일 년 반. 취직에 대해, 그동안 배워 왔던 것들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광주문화재단의 ‘지역 주도형 청년 문화 일자리 지원 사업’을 보고 단숨에 지원서를 썼다.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영원히 패배한 인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 것만 같았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참여 단체 중 내가 가진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다. 문화 기획과 공익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비영리 단체에 취직하게 되어 첫 출근을 준비하는 아침, 거울을 보며 갑자기 두려워졌다. 스물아홉 나이에 첫 취직인 탓이었다. 취직에 성공했던 학교 선배의 말도 떠올랐다. “야 다 필요 없고 엑셀 배워 엑셀” 자격증은 하나도 없고 스펙의 대명사인 토익 시험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이곳은 내가 필요한 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도 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 지원 사업의 좋은 특징 중 하나는 일터에서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업무 교육을 한다는 것이었다. 지출 결의서 쓰는 방법을 배울 때는 정말 울고 싶었다. 자꾸 계산을 틀리거나 중요한 요점을 빼먹었다. 또 다음 날 아침에 사용해야 하는 중요한 인쇄물을 뽑다가 프린터가 갑자기 먹통이 돼서 고치다가 밤 10시가 넘었을 때는 좀 서글펐다. 그래서인지 보통사람보다는 프린터를 잘 고치는 능력이 생겼다.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니 새삼 지금의 내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애초부터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첫 월급의 기억도 떠오른다. 자취를 하였기에 라면을 자주 먹었다. 첫 월급을 타던 날, 편의점 아닌 라멘 가게로 갔다. 면을 추가하고 차슈까지 얹어 한 그릇을 비웠다. 한 끼에 1만 1000원을 썼다. 이전에는 없던 사치였다. 정말 너무 맛있었다. 왜 이런 맛을 모르고 살았나 싶었고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본 기분이었다. 그러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부모님은 이런 음식을 드셔 보셨을까? ‘집에 가면 사드려야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라멘을 사드릴 수 없었다. 안동엔 라멘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 ‘청년 문화 일자리 지원 사업’에 참여한 지 2년이 지났고 이제 지원은 끝났다. 지원 사업이 끝났어도 나는 이곳에서 계속 일하게 되었다. 이른바 정직원이 된 것이다. 배우고 익히며 온갖 실수를 했으나 나를 채용해준 대표님은 내게 ‘함께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이 못내 부끄러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대표님과 일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단체의 이익과 미래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 사업에서 참여 단체에 더 실질적인 이익이 될 수 있는 교육비를 책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가르치던 대표님의 노고를 생각하면 솔직히 나라면 못할 일이다. 또 만약 내가 일을 그만두었다면 참여 단체에는 어떤 실질적인 이익이 남았을지 모르겠다. 그 밖에 광주문화재단에서 준비한 여러 교육은 좋은 공부가 되었다. 특히 VOD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줘 언제 어느 때고 직무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광주문화재단에서 사업 종료 선물로 보내준 것들 중에 만년필이 있었다. 왠지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이제 나도 사인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인 듯하다. 앞으로 지출 결의서 사인은 이 만년필로 할 것이다. 내 선택과 결정 그리고 삶의 흔적이 만 년 동안 남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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