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를 받으며
2020년 11월 20일(금) 00:00

박 용 수 광주동신고 교사

봄꽃은 화려하다. 겨울 눈보라가 거셀수록 꽃의 빛깔은 더 선명해진다. 겨울 동백은 푸른 잎 사이에 더 붉고 더욱 선명하다. 비바람을 견뎌낸 매화는 백지장보다 더 희고 그 향기는 훨씬 진하다. 누이의 볼을 닮은 연분홍 살구나무도 온 동네가 불이 난 것인 양 화사하게 꽃불을 피우다가 흰 눈처럼 마당을 가득 켜켜이 덮고야 진다.

꽃 중에도 지독한 오기가 있는 꽃들이 있다면 봄꽃일 것이다. 두드리고 팰수록 붉은 멍울을 내보이며 눈을 부릅뜨고 독기를 내뿜는 것 같다. 진한 향기를 멀리까지 내보내 제 순백의 의지를 밝히고 결기를 세워 항의하는 것 같다. 눈 속에서도 샛노란 빛을 내세우는 복수초는 이름조차 섬뜩하다. 겨우내 진 빚이라도 받으려는지 핏빛 눈을 치켜뜨거나 창백한 얼굴로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하다. 그래서 눈보라가 매서운 겨울은 더욱 봄꽃 볼 생각으로 가슴이 들뜬다.

아쉽게도 봄꽃은 그 꽃이 화려해서 감히 꽃씨라는 단어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마법을 건다. 어쩜 그 꽃씨조차 꽃에 섞여 바람에 날려 멀리 가 버리거나 나무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오기를 부리는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봄꽃은 이럭저럭 꽃씨조차 받기 힘들다.

가을꽃은 순하다. 여름 햇살이나 천둥 번개에 어지간히 힘도 들었겠지만 다사로운 가을 햇살을 맞아 각이 선 잎들도 순해지고 꼿꼿한 줄기도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가을꽃을 보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풍요로워진다. 봄꽃은 꽃씨를 받을 겨를이 없는, 지기가 무섭게 곧장 열매를 맺는 꽃들이다. 봄꽃이 결실을 보기 위해 벌과 나비를 부르는 꽃이라면 가을꽃은 꽃 자체가 목적이다. 코스모스는 바람 따라 하늘거리고, 국화는 논두렁에서조차 지조와 우아함을 잊지 않는다. 백일홍은 가을 한 철 변함없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구절초는 낮게 청초하다.

낮게 고개를 숙이고 꽃씨를 받는다. 가을을 받는다. 꽃은 온몸으로 꽃씨를 만들거나 가을 햇볕을 모아 꽃씨에 저장했는지 꽃씨는 작지만 튼실하다. 여름과 가을 천 근 무게를 두 손을 펼쳐 받는다. 순결한 초목의 아이를 받는다. 자연의 정기를 받는다. 우주의 생명을 받는다.

“가을 뜨락에/ 씨앗을 받으려니/ 두 손이 송구하다/ 모진 비바람에 부대끼며 /머언 세월을 살아오신 / 반백의 어머니, 가을 초목이여/ 나는/ 바쁘게 바쁘게 /거리를 헤매고도 /아무 /얻은 것 없이 /꺼멓게 때만 묻어 돌아왔는데 /저리 /알차고 여문 황금빛 생명을 /당신은 마련하셨네 /가을 뜨락에 /젊음이 역사한 씨앗을 받으려니 /도무지 /두 손이 염치없다.”

꽃씨를 받다가 문득 허영자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꽃씨를 받다가 여인이 되어본다. 꽃씨를 받다가 희망을 두 손으로 받는다. 꽃씨를 받다가 나를 돌아본다. 꽃씨를 받다가 반성문을 써 본다.

난 누구를 꽃처럼 대하고 살았던가. 나는 꽃이 된 적이 있던가. 아니 난 씨앗을 만든 적이 있던가. 내 몸을 불살라 내일의 희망을 만든 적이 있던가. 꽃처럼 피었다가 꽃같이 질 수 있는가.

가을꽃은 화려하게 휘날리는 봄꽃과 달리 조용히 진다. 차가운 서리에 맞서 온몸을 움츠려 씨앗을 껴안고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다. 꽃이 지는 것은 끝이 아니다. 꽃은 제 온몸을 녹여내어 꽃씨를 만든다. 소멸하면서까지 씨앗을 사랑한 꽃, 꽃씨를 받으며 꽃이 전해주는 절절한 애절함에 시인은 어머니를 떠올린 모양이다.

꽃씨를 받는다. 지금까지 핀 꽃에 찬사를 보냈지만, 꽃을 심는 사람의 마음도, 그 꽃이 비와 천둥을 이겨내며 피기까지 관심을 보낸 것도 아니다.

그냥 꽃만 보고 꽃에만 인사를 했던 것 같다. 고향 집 어머니가 주는 대로 받기만 했지 정녕 주고자 한철 내내 힘들였던 노고는 이해하지 못했던 나처럼, 나는 누구에게 한번 꽃이었던가. 난 꽃처럼 온몸을 붉게 불살라 누구를 기쁘게 해본 적이 있던가. 누구에게 진한 향기로 머문 적이 있던가.꽃씨를 받는다. 꽃씨에서 두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꽃씨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꽃씨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꽃씨를 받으며 꽃씨에서 기다림을, 희망을, 사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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