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과 사(私)
2020년 07월 23일(목) 00:00 가가
춘추전국시대 명장인 염파와 인상여의 이야기는 사기열전에 상세히 적혀 있다. 사마천은 조나라에서 재상 대우를 받던 그들과는 달리 일개 조세 담당 관리였던 조사(趙奢)라는 인물을 여기에 끼워 넣어 매우 중히 다루고 있다.
조사는 공사(公私)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하급 관리였던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평원군의 집에서 조세를 내지 않은 사실을 알고, 그 가신들을 모두 처형해 버렸다. 평원군이 대노했지만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했다. “공자와 같이 존귀한 분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나라도 쇠약해져서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평원군이 크게 반성하고 그를 더 큰 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조사의 부인도 공사 구분이 철저했던 모양이다. 조사가 죽고 아들 조괄이 대장군에 올랐는데 조사의 부인이 왕을 찾아가 인사 철회를 요구한다. “아버지(조사)는 국가 대사만 생각하고 왕이나 귀족에게 받은 하사금을 공금으로 사용했지만, 아들(조괄)은 하사금을 모조리 집에 쌓아두거나 땅을 사들입니다.” 그러나 왕은 부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조괄은 진나라와의 장평대전에서 대패해 죽었다. 결국 나라도 망했다. 노자·장자·한비자 등 중국의 사상가들 역시 공(公)과 사(私)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이는 이를 대립적인 명제로 또 어떤 이는 별개의 명제로 다뤘다. 다만 이들은 모두 공공적 가치를 개인적인 가치의 앞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봤다.
동양에서 공과 사의 구분을 중시하는 데 비해 서양에서는 업무(Business)와 재미(Pleasure)가 뒤섞이는 것을 금기시한다. 업무를 보면서 개인적인 이익이나 즐거움 등 포괄적인 의미의 ‘재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공사를 구분하라’는 뜻의 영어 표현(Don‘t mix business with pleasure)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진보가 됐든 보수가 됐든 우리 정치인들은 유독 공사 구분에 취약하다. 권력에 취해 개념을 상실하거나 사적인 재미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사 구분을 못하는 정치인들을 퇴출시키는 것이야말로 정치 혁신의 첫걸음 아닐까.
/윤현석 정치부 부장 chadol@kwangju.co.kr
조사는 공사(公私)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하급 관리였던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평원군의 집에서 조세를 내지 않은 사실을 알고, 그 가신들을 모두 처형해 버렸다. 평원군이 대노했지만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했다. “공자와 같이 존귀한 분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나라도 쇠약해져서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평원군이 크게 반성하고 그를 더 큰 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진보가 됐든 보수가 됐든 우리 정치인들은 유독 공사 구분에 취약하다. 권력에 취해 개념을 상실하거나 사적인 재미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사 구분을 못하는 정치인들을 퇴출시키는 것이야말로 정치 혁신의 첫걸음 아닐까.
/윤현석 정치부 부장 chadol@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