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넘고 넘어
2020년 07월 08일(수) 00:00 가가
경상저수지를 지나서 무동리를 향해 접어든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있던 길 주변에는 막 흰 꽃을 매달기 시작한 애기나리 무리들이 나무 사이로 비껴든 햇살을 받아 투명한 연두색 이파리를 애잔하게 흔들며 길손을 반긴다.
백남정재! 민족 수난기에 수십, 수백의 의로운 장정들이 쫓고 쫓기며 생사를 걸고 넘나들던 고개다. 유둔치에서 북산을 향해 세력을 떨치던 호남정맥의 산세가 무등을 향해 본격적인 상승을 앞두고 잠시 호흡을 조절하는 길목이다. 이곳에서 나무꾼도 쉬고, 장꾼들도 이마에 땀을 훔치며 잠시 한숨을 돌렸을 것이다. 그저 말없이 재를 지키고 있는 돌무더기 위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라는 마음을 실어 가만히 돌 하나를 얹어 본다.
삶은 길 위에 있다더니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우리네 삶도 이리저리 뻗어가나 보다. 길을 따라 삶을 가꾸고 인연을 만들며 세상과 소통하니 길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아닌가. 길이 없다면 인연도 이웃도 생길 수 없을 터. 사람이 끝내 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처럼 길에서 길로 이어진 온갖 만남과 인연 때문에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절절한 아픔과 그리움으로 평생을 가슴앓이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동리 이서댁도 그렇게 서방님을 만났다. 지금은 옹성산 밑 푸른 물속에 친정을 내어 주고 말았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커간다. “좋기는 머시 좋아? 코빼기가 어디 붙은 줄도 모르고 시집왔는디.” 얼마나 좋았으면 17살 어린 나이에 서둘러 시집왔냐고 던지는 농담에 준비된 듯 받아치는 대답이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진한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
겨우 배낭 하나 메고서 힘들게 재를 넘어왔다는 말이 무척 호사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땀을 흘리려는 사람과 살아가기 위해 흘려야 하는 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산속 덤불숲을 이리저리 헤매며 채취한 산나물을 광주리에 가득 담아 이고, 등에는 젖먹이를 업은 채 새벽녘에 집을 나서기 시작한 이래로 평생 이 고개를 무수히 넘고 또 넘었다. 무등산 허리를 반 바퀴 돌아 광주의 장터에서 나물을 모두 팔고 나서야 팥죽 한 그릇에 허기를 달래고 나면 돌아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가며 서둘러서 왔던 길을 되짚어 집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캄캄한 저녁이다. 집에 남겨둔 딸아이는 늦어지는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얼굴에 하얀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엎드려 자고 있다. 피곤함에 앞서 엄마의 가슴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잠시 “요즘 우리 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생각해 본다.
남매를 두고 서둘러 세상을 떠나버린 서방님이 야속하다는 말보다도 산중에서 궁색한 살림 탓에 많이 가르치지 못한 자식들 보기가 지금도 미안하다는 말을 앞세우는 그 마음이 더욱 시리다. ‘저 마음이 끝내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 간직한 모성이구나!’ 아들이 내 또래라며 바라보는 눈길이 영락없이 생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젖먹이들에게 젖을 나누며 살아온 살가운 정감이다. “인자 이런저런 생각도 다 내려놨어. 해봤자 모다 씨잘데기 없는 것들인디 혀서 머해? 아픈 디나 쪼까 덜 아프다가 갔으먼 허제.” 삼계유심(三界唯心)인가. 살아온 굽이굽이마다 쌓이는 게 한숨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한순간의 이야깃거리로 남의 이야기처럼 허허롭게 풀어낼 만큼 스스로 가벼워졌다. 사람이든 산이든 자주 마주보고 오래 살다 보면 많이 닮아간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무등산을 닮은 편안함과 넉넉함이 온몸 가득하다.
길에서 만난 풀과 나무, 새들에게 말을 건네고 만나는 사람들의 삶에 귀 기울여보는 것이 설익은 책들보다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길 따라 만나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 속에서 건져 올린 소중한 삶의 가르침이 청미래덩굴의 새잎처럼 신선하기만 하다. 내가 무돌길을 즐겨 찾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벌써 마을 정자까지 내려온 산그늘, 뒷말을 줄인 할머니 얼굴에 눈부터 시작한 작은 미소가 잔잔하게 번진다.
삶은 길 위에 있다더니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우리네 삶도 이리저리 뻗어가나 보다. 길을 따라 삶을 가꾸고 인연을 만들며 세상과 소통하니 길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아닌가. 길이 없다면 인연도 이웃도 생길 수 없을 터. 사람이 끝내 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처럼 길에서 길로 이어진 온갖 만남과 인연 때문에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절절한 아픔과 그리움으로 평생을 가슴앓이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남매를 두고 서둘러 세상을 떠나버린 서방님이 야속하다는 말보다도 산중에서 궁색한 살림 탓에 많이 가르치지 못한 자식들 보기가 지금도 미안하다는 말을 앞세우는 그 마음이 더욱 시리다. ‘저 마음이 끝내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 간직한 모성이구나!’ 아들이 내 또래라며 바라보는 눈길이 영락없이 생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젖먹이들에게 젖을 나누며 살아온 살가운 정감이다. “인자 이런저런 생각도 다 내려놨어. 해봤자 모다 씨잘데기 없는 것들인디 혀서 머해? 아픈 디나 쪼까 덜 아프다가 갔으먼 허제.” 삼계유심(三界唯心)인가. 살아온 굽이굽이마다 쌓이는 게 한숨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한순간의 이야깃거리로 남의 이야기처럼 허허롭게 풀어낼 만큼 스스로 가벼워졌다. 사람이든 산이든 자주 마주보고 오래 살다 보면 많이 닮아간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무등산을 닮은 편안함과 넉넉함이 온몸 가득하다.
길에서 만난 풀과 나무, 새들에게 말을 건네고 만나는 사람들의 삶에 귀 기울여보는 것이 설익은 책들보다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길 따라 만나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 속에서 건져 올린 소중한 삶의 가르침이 청미래덩굴의 새잎처럼 신선하기만 하다. 내가 무돌길을 즐겨 찾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벌써 마을 정자까지 내려온 산그늘, 뒷말을 줄인 할머니 얼굴에 눈부터 시작한 작은 미소가 잔잔하게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