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약속, 단 하나의 약속
2020년 06월 18일(목) 00:00

박용수 동신고 교사

혹여 지키지 못한 약속은 없었는가. 너무 가볍게 여겨서, 너무 미워서 흘려버리거나 놓쳐 버린 약속은 없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걷다 보니 40년 전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전남 도청에 있고 망월동에도 있으며, 충장로 금남로 곳곳에 함성으로 바람으로 그리고 숨결로 그 약속이 남아 있다. 그리고 ‘5·18 40주년 기념 공연, 2020년 애꾸눈 광대의 ‘그날의 약속’’ 공연장에도 오월 광주가 힘차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연극은 아들을 지켜야 했던 어머니와 도청으로 달려간 고등학생 이야기 그리고 조금은 잊힌 도청 지하실 다이너마이트를 사이에 둔 무기 회수파와 결사 항쟁파의 이야기를 통해 40년 전의 희미해진 약속들을 생생한 목소리로, 유쾌하게 때론 엄중하게 들려준다.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 순 없다는 종팔의 어머니는 도청을 향해 가는 아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박종팔은 계엄군의 잔혹한 총탄에 쓰러진 친구에게 끝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한다. 두 사람의 약속은 어쩌면 지킴과 뺏음, 선과 악 그 어떤 것도 생명보다 소중할 수 없다는 절규이다.

그리고 전도사 문운동 역시 꼭 살아서 데이트하자고 약혼녀 나일순과 약속을 하고 도청으로 향한다. 안타깝게도 그날 약혼녀가 채워준 손목시계는 그날 5월 27일 계엄군의 총탄에 그의 심장이 뚫고 지나가면서 멈춘다.

어머니의 약속, 박종팔의 약속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약속이라기보다 절대 악과 만났을 때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약속인지 모른다. 지키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도사가 약혼녀에게 한 약속은 둘의 사랑보다 더 큰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깜깜한 새벽, 독재 정권에 세뇌된 계엄군들이 탱크를 몰고 도청으로 진입하는 순간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굳게 다짐을 한다. 어머니와 아들의 약속, 약혼녀와 전도사가 다짐한 약속 아니 광주시민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한민국 민중들의 각기 하나의 약속에서 확장된 천 개, 만 개 다짐한 약속은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혼백으로라도 꼭 돌아와 만나자. 더는 독재와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세상에서 만나서 서로 함께 살자”라는 한 명 한 명의 약속이 우리 모두의 약속으로 승화된다.

반면에 권력욕에 가득 찬 전두환과 세뇌된 계엄군의 “항복하면 용서 하겠다”라는 거짓 약속, 비열한 거짓은 더없이 추하고 깃털보다 가볍다.

그래서 ‘그날의 약속’은 과거형이라기보다 진행형이고 우리 앞에 무겁게 놓여 있는 미래형이다. 너무 사랑해서 죽어도 지켜야만 할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만 하는 약속, 진짜 약속이다.

현장감 넘치는 음향과 배우들의 열정적 숨소리,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과 함께 우리는 잠시나마 오늘을 잊고 그날 5월로 돌아가며, 또 나를 잊고 모두가 되는 공연.

당시 도청에서 최후까지 싸운 고 김영철 시민군의 따님이 직접 출연하여 절절한 안무로 도청에서 쓰러진 영혼들을 부활시키는 부분, 약속이 지켜지는 정점에서 당신도 폭풍 눈물을 만날 것이다.

아직도 5·18 기록관에는 그때 멈춘 문용동 씨의 시계가 멈춰 있다. 그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도록 바라는 염원으로 문 앞을 나서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인지 모른다. 5·18이 더는 잊히지 않고 기억되기를. 더 왜곡되지 않고 자랑스럽게 울려 퍼지길 바라는 것이 우리의 약속이고 5·18을 연극으로 부활시키고자 몸부림치는 애꾸눈 광대 이세상 씨의 약속일 것이다.

연극 ‘그날의 약속’은 만석을 이룬 가운데 막을 올렸다. 이날 공연에는 80년 당시 항쟁 지휘부와 공수부대 출신 최영신 씨가 만나 용서와 화해의 시간을 마련하여 관객들에게 벅찬 감동을 선물하며 40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날의 약속’은 광주 아트홀에서 6월부터 9월까지 매월 넷째 주 화, 수요일에 정기적으로 공연하며 순회 공연을 통해서도 5월 정신을 알릴 예정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지키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약속들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단단히 다짐하고 5월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 공연장으로 향할 것, 단단히 울고 웃을 준비를 할 것, 5월은 치열한 싸움이고 뜨거운 사랑이기에 주저하지 말 것.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니 힘차게 희망을 읽을 자세를 갖추고 나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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