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한 분구묘
2020년 06월 17일(수) 00:00
마한 분구묘에는 왜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을까
지상에 흙더미 쌓아 주검 안치 ‘분구묘’
혈연공동체적 유대로 만들어진 가족묘
4세기말~6세기초 영산강유역서 성행

전남 나주 복암리 유적의 수직 확장 분구묘 (1996~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전남대학교박물관 공동발굴)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죽은 사람을 방치하지 않고 땅속에 묻어주는 행위는 우리 인간만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은 지역, 시기, 종교 등에 따라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 토광을 파고 깊이 묻어주는 토장이 일반적이었다. 청동기시대 지석묘 역시 땅을 파고 묻은 점에서 동일하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대신 큰 돌을 덮은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흙이든 돌이든 기본적으로는 모두 무덤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땅을 파서 죽은 사람을 묻고 그저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그 위에 쌓은 흙더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지만 마한에서는 땅을 파는 대신 지상에 흙더미를 쌓고 그 안에 주검을 안치하였다는 점이 특별하다.

전자는 흙더미로 토광을 밀봉하는 것이기 때문에 봉분묘(封墳墓)라 부르고 후자는 흙더미를 구릉처럼 쌓아 이용하기 때문에 분구묘(墳丘墓)라 부른다.



◇봉분묘와 분구묘

봉분묘와 분구묘는 모두 마한의 무덤이다. 봉분묘는 동북아시아의 오래된 전통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이고 지금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무덤도 그 연장선에 있다.

분구묘는 기원전후경부터 황해에서 가까운 마한 지역에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4세기말부터 6세기초까지는 영산강유역에서 특히 성행하였다.

주검을 안치하는 공간이 지하의 토광인지 지상의 분구인지의 차이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단순한 묘제의 차이가 아니라 생사관과 직결되는 장제의 차이이며 문화적 계통의 차이와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분구묘는 지하에 토광이 없는 대신 지상의 분구에 목관, 목곽, 옹관, 석실 등을 손쉽게 축조하여 죽은 사람을 안치할 수 있다. 따라서 분구의 크기에 따라 적게는 3~4인부터 많게는 30~40인에 이르기까지 추가장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여러 사람을 묻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무덤이다.



전남 함평 만가촌 유적의 수평 확장 분구묘 (1994년 전남대학교박물관 발굴)
◇분구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마한의 분구묘는 경기, 충청, 전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농경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던 마한 사회는 기원전후경부터 전세계적인 기후 악화로 인해 크게 위축되면서 종래의 지석묘를 대신하여 분구묘를 쓰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분구묘가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외부에서 파급된 것인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초기 분구묘들은 황해 연안지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고 내륙지역에는 봉분묘가 사용되고 있었지만 점차 분구묘는 큰 강을 따라 내륙으로도 확산되어 나갔다. 한강을 따라서는 서울 강남지역으로 파급되었고, 금강을 따라서는 충청·전북 내륙으로 확산되었으며, 영산강을 따라서는 담양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가 성행하였다.

이와같은 현상은 분구묘 축조인들이 해양활동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데 황해를 건너 마한지역과 마주보고 있는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서도 같은 성격의 무덤들이 성행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중국 동부 해안지역은 고대 오월지역에 해당하며 그와같은 구조를 가진 무덤을 토돈묘(土墩墓)라 부르는데 마한 분구묘와의 관련 가능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하나하나 밝혀 나가야 할 것이다.



◇가족묘로 축조된 분구묘

분구묘는 봉분묘와 달리 다인장, 대형 옹관, 수직적·수평적 분구 확장 등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다인장이다.

분구묘에서 확인되는 다인장은 동시장에 의한 순장과는 전혀 다르다. 시기를 달리하는 추가장에 의해 이루어진 다인장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족을 중심으로한 혈연공동체적인 유대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분구묘 자체가 가족묘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42개의 매장시설이 확인된 다인장 무덤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의 매장시설에도 여러 사람이 매장된 대표적인 가족묘이다. 특히 한 옹관에서 출토된 2인의 인골은 DNA 분석을 통해 모계가 같은 친족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이 무덤이 가족공동체의 무덤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분구묘에서는 추가장이 이루어지면서 기존 무덤을 증축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구를 수평적으로 확장함에 따라 길다란 사다리꼴을 띠었다가 5세기부터는 방형으로 고정되면서 수직적으로 확장함에 따라 높고 웅장한 무덤이 되었다.



전북 완주 상운리 유적의 수평 확장 분구묘 (2004년 전북대학교박물관 발굴)
◇분구묘의 역사문화적 의미

분구묘가 성행하였던 마한 지역은 농경이 발전하였던 지역으로 노동집약적인 농경의 특성상 혈연공동체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와같은 사회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의 역할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노인들은 사망 후 마을 가까운 곳에 묻히고 조상신으로 숭배되었다.

선사, 고대의 무덤은 씨족 공동체 묘역에 개인별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마한 사회에서는 씨족 공동체 묘역에 여러 분구묘들이 만들어지되 하나의 분구묘에 여러 사람이 묻히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하나의 분구묘가 한 가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6세기 중엽에 이르러 광주·전남지역의 마지막 마한 사회가 백제에 병합되자 백제의 묘제에 따라 개별적으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나주 복암리 3호분을 보면 기존 선조들의 무덤에 백제 관리가 된 후손들까지 추가장되는 특별한 현상이 확인된다.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혈연공동체 의식이 매우 특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장 늦은 시기까지 대규모 분구묘가 성행하였던 지역은 전북 고창을 포함한 광주·전남지역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은 국내 최대 지석묘 밀집권에 해당한다. 지석묘는 마한 이전의 무덤이지만 청동기시대 성숙했던 농업공동체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기도 하다.

마한 분구묘는 청동기시대 지석묘와 함께 농업공동체 사회의 혈연적 유대 속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가족 무덤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같은 혈연적 유대는 소국 단위의 마한 사회를 더 이상 키워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마한 소국들이 통합된 고대국가를 이루지 못하게 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