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5월에 부쳐
2020년 05월 21일(목) 00:00 가가
해마다 5월이 찾아오면 광주·전남은 몹시 아프다. 그날의 기억, 쓰러져 간 오월 영령들, 계속되는 왜곡과 도발에 더욱 아프다. 사람으로 치면 불혹(不惑)이 되어 쉽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나이임에도 그렇지 못하다.
올해 처음으로 세계기록유산이 광주를 떠나 서울로 갔다. 5월 13일부터 광화문 앞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5·18 40주년을 기리는 특별전 ‘오월 그날 다시 오면’이 열리고 있다. 그 제목에 눈이 간다. 번안곡인 ‘오월의 노래 2’의 후렴구이다. 그 노래는 ‘꽃잎처럼 금남로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한다.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에이 설마’했다. ‘국민의 군대’가 국민들을 상대로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뒤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며 5·18 관련 자료와 사람들을 보고 만났다. 그리고 다시 놀랐다. ‘설마’했던 노래의 가사가 사실(事實)이며, 사실(史實)이어서다.
40년 전 5월 광주에서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이 이어졌다. 5월 18일 시작된 공권력의 폭력과 야만은 시간과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전남대에서 시작되어 금남로, 충장로, 조선대 등 광주 시내 곳곳에서 국가는 글로 옮기기 힘든 폭력을 저질렀다. 그 누구도 말리기 쉽지 않았다. 5월 19일 오후 계림동에서 발사된 군의 총격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5월 19일 계림동, 5월 20일 광주역, 5월 21일 금남로와 중흥동, 광주교도소,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주남마을, 화정동, 광주교도소 부근, 송암동 등등 광주 외곽에서 군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부처님의 자비가 넘쳐야 할 초파일 한낮 금남로에서는 군의 조준 사격도 있었다.
그리고 5월 27일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YWCA, 광주공원을 비롯한 광주 시내 전역에서 군은 국민들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그때마다 많은 시민들이 이유도 모른 채 희생됐다. 희생자들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임산부, 50대 엄마, 청년 등 다양했다.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이 그와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5월 22일 광주시 외곽을 둘러싼 군의 봉쇄선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어 광주를 드나드는 시민들에게 발포하고 그 억울한 죽음마저 왜곡했다. 노랫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현실은 오히려 더 처참하고 잔혹했다.
‘오월의 노래’를 들으며 들었던 또 다른 의문은 ‘그럼에도’였다. 시민들은 대한민국 최강의 특수부대에 거의 맨손으로 맞서고 총 쏘는 군대에 맞서 총을 들었다. 어쩌면 예고된 패배의 순간에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정부, 정확히 신군부는 그들을 ‘폭도’라며 의롭고 외로웠던 그날들의 항쟁을 ‘폭동’과 ‘내란’으로 각색해갔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실행됐고, 광주의 시민들은 ‘폭도’로 매도됐다. 5월 27일 새벽, 찢어 드는 듯 계속되는 총소리를 들으며 광주 시민들은 피울음을 삼켜야 했다.
어쩌면, 이 땅에서 다시 인권과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좌절하지도 무릎 꿇지도 않았다. 공권력에 가로 막힌 망월동에 찾아가고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안고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오월 영령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꿈들을 이루려고. 쉽지 않은, 어쩌면 또다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싸움임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국가 폭력에 대항하며 함께 어깨를 걸고 싸웠듯이 그날의 경험과 기억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그날 ‘국민의 군대’를 광주로 보냈던 자들에게 죄를 묻고 처벌했다. 그러나 이내 풀려난 자들은 40년 전의 거짓을 확대 재생하고 있다. 섣부른 용서와 화해는 과거를 왜곡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왜곡한다.
40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 5·18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날의 연대의 기억을 떠올린다. 코로나19로 대구가 어려워졌을 때 빛고을은 누구보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1980년 5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 5월의 정신이다. 주먹밥을 나누고 피를 뽑으며 이웃과 함께 했다. 여러모로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다시 그날의 소중함을 간직한 채 새로운 40년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올해 처음으로 세계기록유산이 광주를 떠나 서울로 갔다. 5월 13일부터 광화문 앞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5·18 40주년을 기리는 특별전 ‘오월 그날 다시 오면’이 열리고 있다. 그 제목에 눈이 간다. 번안곡인 ‘오월의 노래 2’의 후렴구이다. 그 노래는 ‘꽃잎처럼 금남로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한다.
‘오월의 노래’를 들으며 들었던 또 다른 의문은 ‘그럼에도’였다. 시민들은 대한민국 최강의 특수부대에 거의 맨손으로 맞서고 총 쏘는 군대에 맞서 총을 들었다. 어쩌면 예고된 패배의 순간에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정부, 정확히 신군부는 그들을 ‘폭도’라며 의롭고 외로웠던 그날들의 항쟁을 ‘폭동’과 ‘내란’으로 각색해갔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실행됐고, 광주의 시민들은 ‘폭도’로 매도됐다. 5월 27일 새벽, 찢어 드는 듯 계속되는 총소리를 들으며 광주 시민들은 피울음을 삼켜야 했다.
어쩌면, 이 땅에서 다시 인권과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좌절하지도 무릎 꿇지도 않았다. 공권력에 가로 막힌 망월동에 찾아가고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안고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오월 영령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꿈들을 이루려고. 쉽지 않은, 어쩌면 또다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싸움임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국가 폭력에 대항하며 함께 어깨를 걸고 싸웠듯이 그날의 경험과 기억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그날 ‘국민의 군대’를 광주로 보냈던 자들에게 죄를 묻고 처벌했다. 그러나 이내 풀려난 자들은 40년 전의 거짓을 확대 재생하고 있다. 섣부른 용서와 화해는 과거를 왜곡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왜곡한다.
40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 5·18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날의 연대의 기억을 떠올린다. 코로나19로 대구가 어려워졌을 때 빛고을은 누구보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1980년 5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 5월의 정신이다. 주먹밥을 나누고 피를 뽑으며 이웃과 함께 했다. 여러모로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다시 그날의 소중함을 간직한 채 새로운 40년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