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스홀’
2020년 05월 15일(금) 00:00 가가
진정세를 보이던 ‘코로나19’가 이태원 클럽 감염 확산으로 다시금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서 음주와 신체밀착이 이뤄지는 탓에 클럽 등 유흥 시설에서의 감염 우려가 높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한사코 클럽을 찾는다. 젊은이들의 클럽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클럽은 기록상으로 보면 ‘딴스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다. 파인 김동환이 발간한 잡지 ‘삼천리’ 1937년 1월호에는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당시 연예계 종사자 8명이 일본인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공개 탄원서였다. 진정인은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다방) 비너스 마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바 멕스코 여급 김은희, 영화배우 오도실, 동양극장 여배우 최선화 등이다.
이들은 청원서 머리에 이렇게 썼다. “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주십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만일 서울에 두기가 곤란한 점이 있거든 마치 대판(大阪)에서 시내에는 안 되지만 부외(府外)에 허하듯이 서울 근접한 한강 건너 영등포나 동대문 밖 청량리 같은 곳에 두어 주십사 청하나이다.”
이들은 또 자신들이 동경이나 상해 그리고 서양까지도 다녀온 사람들로서, 문명국의 상황을 보면 딴스홀은 친교의 장일 뿐 항간의 돈 낭비와 풍기 문란의 장소라는 지적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조선 사람들이 사교를 위해 가는 명월관이나 식도원 같은 요릿집은 40~50원의 비싼 유흥비를 내야 하지만, 딴스홀은 5전 10전 하는 티켓 값만 들기 때문에 낭비 요소가 없으며 술 먹고 주정 부리는 일도 없다며, 경제적이고 문화적이라는 장점(?)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딴스홀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흘러 1950년대에 나이트클럽이 등장한다. 현재는 도시마다 클럽이 없는 곳이 없다. 젊음의 자유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다만 ‘코로나19’가 물러갈 동안만이라도 잠시 자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채희종 사회부장 chae@kwangju.co.kr
그럼에도 딴스홀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흘러 1950년대에 나이트클럽이 등장한다. 현재는 도시마다 클럽이 없는 곳이 없다. 젊음의 자유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다만 ‘코로나19’가 물러갈 동안만이라도 잠시 자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채희종 사회부장 chae@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