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를 위한 함께 서기
2020년 05월 13일(수) 00:00

오세근 동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장애인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기회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는 장애인의 능력 개발과 사회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에 대한 복지 서비스를 늘리고 차별을 금지하는 근거 법령을 제정하고 시행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장애인과 그 가족은 교육·노동 등 생존권은 물론 치료와 재활, 교육, 지역 사회 통합 등 생활 영역에서 두루 삶의 기회를 제약 받거나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신 질환을 지닌 사람에 의한 살인이나 방화 사건이 발생하면 대다수 정신 장애인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거나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차별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정신 질환 장애인을 돌보는 책임과 의무를 가족이나 보호 의무자에게 거의 떠넘기고 있는데, 그들 또한 생계유지 활동으로 정신 장애인 가족을 보살필 여유를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정신 장애인의 ‘정상화’와 ‘사회 통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신 장애인 복지의 새로운 구상과 실천이 필요하다.

‘당사자주의’라는 정신 장애인 복지의 새로운 실천 모델이 주목을 받고 있다. ‘당사자주의’는 정신 장애인 자신이 안고 있는 고생에 대처하는 일을 사회복지 시설이나 의료 전문가 혹은 가족에게 떠맡기거나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다운 고생을 되찾는 과정을 통하여 ‘삶의 주역’이 되려고 한다. 이런 의도를 가장 본격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곳이 ‘베델의 집’이다.

베델의 집은 1984년 4월 일본 홋카이도의 우라카와 지역에 설립된, 정신 장애인들의 지역 생활 공간이다. 베델의 집은 원래 1978년 우라카와 적십자병원의 정신과를 이용하는 조현병 환자의 회복을 위한 자조 모임 ‘도토리회’ 활동에서 연유한 것이다. 자조 모임은 우라카와 교회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히타카 지역 특산물인 다시마를 포장 배송하는 경제 활동을 통해 정신 장애인의 사회적 역할을 확보하려는 활동으로 확대된다. 다시마 가공 판매에서 시작한 사업은 지금은 연 매출 1억 엔, 100여 명이 넘는 정신 장애인들이 일하는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

베델의 집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정신 장애인의 거주 공동체이자, 노동 공동체이며, 돌봄 공동체이다.

조현병을 비롯해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 대부분은 스스로도 그 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데 베델의 집 사람들은 그 병을 적극적으로 인정함은 물론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관심과 배려로 장애를 넘어서려고 한다. 국가 복지·의료 서비스의 ‘관리와 치료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장애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적극 직조하려는 것이다.

종래의 정신 장애인 복지 패러다임에서 환청과 같은 증상은 숨기거나, 약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델의 집에서는 환각이나 환청 등을 함께 생활하는 동료에게 말하고, 속사정을 나누면서 서로 지지하고 격려한다.

장애인 복지 연구자나 실천가, 정신 의료인, 국제정신의학회, 철학자 등이 베델의 집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신 장애를 질환이 아닌 개성으로 이해하고, 정신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생활 공동체 구성원의 관심·배려·나눔을 통해 스스로 풀어 가려는 인간관계 형성,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문제 해결 역량에 주목하는 것이다.

베델의 집의 생활 방식은 정신 질환이 주는 고통을 서로 공감하고, 어려운 삶의 조건을 배려와 협력으로 넘어서려고 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생성 그 자체이다. 말하자면 ‘산다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당연지사의 새로운 실현 방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서로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감응에 연원을 두고 형성된 인간관계는 장애와 비장애, 사회복지 및 의료 전문가와 서비스 대상, 행정 관료와 서비스 이용자 등으로 나뉘는 소원한 관계를 해소한다.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정신 장애인 스스로의 문제 인식, 문제 해결에 필요한 자원의 동원과 활용, 일과 노동을 통해 생활 문제를 풀어가려는 주체적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정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나 배제 문제를 풀어갈 때 본보기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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