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졸였던 그날 밤도 이젠 추억이 되고
2020년 04월 30일(목) 00:00
벌써 추억이 된 것인가. 겨우 2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개표 방송을 지켜보던 그날 밤. 그렇게 바작바작 맘을 졸여 본 적이 또 언제 있었던가. 내 가족이 출마한 것도 아니요 예전처럼 맛있는 닭죽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세상에. 그저 몇몇 후보들의 낙선을 간절히 바라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니. 놀라운 건, 의외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하긴 ‘꼭 떨어져야 할 사람들이 떨어지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야 모두들 똑같았던 게지.

아니, 저런 친구가 1위를 하고 있다니, 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문득 깨 보면, 다행히 그가 2위로 처져 있고. 됐어, 됐어, 잠시 안도하다 보면 어느새, 그 친구 다시 치고 올라오고. 참으로 밤새 애간장이 다 녹는 줄 알았지 뭔가. 우선 세월호 인양 반대와 5·18 관련 막말의 장본인인 김진태 의원이 엎치락뒤치락 끝에 정말, 하마터면 당선될 뻔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하다. 동이 트고 난 뒤 오죽했으면 “그 친구 되는 줄 알고 식겁(食怯)했다”는 댓글까지 올라왔을까.

5·18 관련 막말을 일삼았던 이종명·김순례 의원도 천만다행으로 떨어졌다. 국회의장에게 ‘성희롱하지 말라’고 되지도 않은 말을 외쳤던, 게다가 ‘아까징끼’를 섞어 혈서를 쓴 의혹을 받았던 이은재 의원도 떨어졌다. ‘막말의 달인’ 민경욱·이언주 의원도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황교안 대표는 물론이고, 나경원·심재철 원내대표 등도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툭하면 장외로 뛰쳐나가 국정의 발목을 잡았던 죄과(罪科)로 인한 당연한 업보(業報)다. 다행히 떨어져야 할 사람들은 대부분 다 떨어졌다. 이들이 추풍낙엽처럼 그렇게 우수수 떨어지면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맞게 됐다.

선거가 끝나고 늘 그랬듯이 이런저런 분석이 쏟아졌다. 그래 나올 만한 말은 다 나온 것 같으니, 여기에 또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탬으로써 지면(紙面)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뭐냐 하면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은 미래통합당의 패배 원인이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던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첫 문장처럼, 패배한 쪽에서는 백 가지 이유를 들어도 모자랄지 모른다. 가령 막장 공천에, 툭 하면 터져 나오는 막말에, 위성 정당이라는 꼼수에, 대안 부재와 리더십 부재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 패인



게다가 현 정권에 대한 심판론을 기대했겠지만 아뿔싸.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미국이나 일본이 선진국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거지. 그걸 우리 국민이 스스로 깨닫게 되는데. 마치 호손의 소설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큰바위 얼굴’은 그 누구도 아닌 늘 진실하고 겸손했던 주인공 자신이었던 것처럼, 우리 국민은 바로 우리 자신이 ‘큰바위 얼굴’임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위대성에 우리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사이, 덩달아 현 정부에 대한 인기도 고공행진을 계속하게 됐으니, 야당의 설 땅은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었던 거다.

뭐,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일 텐데. 하지만 나는 여기에 통합당의 패인 하나를 새로 추가하려 한다. 그것은 그들이 마치 데워지고 있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한 채 착각 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도 되리라는 그 착각은 일부 언론의 부추김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거야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과연 야당이 어떻게 나가든 무조건 그들 편을 들어주는 언론이 있었으니. 부모가 오냐오냐하고 키우면 버릇이 더 나빠지는 자식처럼, 그들은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 폐족처럼 근신(謹愼)했어야 할 그들이 어이없게도 단식 흉내를 내거나 삭발을 하고,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되지 않는 독재 타도를 외친 것도, 배후에 그들을 다독여 주고 논리를 제공해 주는 신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난 이번 야당의 가장 중요한 패인으로 그들을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일부 보수 언론의 노골적인 편향성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은 미래통합당의 구원투수로, 최근 또다시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이 추대됐다. 물론 그가 ‘4개월 짜리 위원장’은 못하겠노라며 일단 강하게 거부의 몸짓을 취하고 있긴 하다. 항일투사이자 훌륭한 법조인이었던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의 손자라는 후광(後光)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국보위에 참여함으로써 처음 정계에 발을 내디딘 사람. 뇌물수수로 구속된 적도 있으며, 2012년과 2016년 각기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비대위원장을 지냈으나 두 번 다 두 대통령에게 ‘팽’(烹) 당한 사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나는 4년 전 그가 민주당을 맡았을 때 바로 이 난(欄)을 통해 그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신랄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2016년 1월22일, 이홍재의 세상만사 ‘사람이 그렇게도 없더란 말인가’ 참조)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딱 한마디 이런 칭찬(?)의 말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가 뛰어난 책사(策士)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그가 이번에 통합당을 맡아서 잘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것은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야당이 살아야 여당도 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상당한 정치적 감각도 갖추고 있다. 며칠 전 그가 비대위원장을 수락하면서 “70년대에 출생한 사람 중 비전을 갖춘 사람이 지도자로 부상했으면 한다”고 말한 데서도 그런 감각을 엿볼 수 있다. 2년 후면 누가 되든 민주당 대선 후보의 나이는 70세 언저리일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새로운 ‘40대 기수론’은 먹혀들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 당장 통합당의 처지는 ‘사공 없는 나룻배’ 신세다. 아니, 침몰하는 배 안에서 선장 자리만 노리고 서로가 다투고 있는 꼴이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밀당’을 거친 뒤 통합당이 ‘김종인 체제’를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본다. 기왕에 그렇게 된다면 비대위원장을 맡은 그가 ‘정당 구조조정 전문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통합당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 바꿔 놓기를 바란다. 대신 사심(私心)은 버리고, 두 번이나 ‘팽’ 당한 트라우마가 있겠지만 토사구팽 그까짓 것, 두 번 아니라 세 번도 당해 줄 수 있다는 각오로.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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