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증명한 진리
2020년 04월 27일(월) 00:00 가가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육군은 연전연패했다. 용인전투에서는 무려 10만 대군의 조선군이 불과 1600명의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둔 조선의 영웅들이 있다. 1592년 6월 16일의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신각을 비롯해 의병장 곽재우는 5월 24일의 정암진 전투에서, 권율은 7월 8일의 이치 전투와 1593년 2월 12일의 행주대첩에서 이겼다. 순수하게 조선인만을 이끌고 승리했다. 그런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장수가 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자 신각이다. 왜 그랬을까?
한양을 떠나 파천 길에 오른 선조에게 장계가 올라왔다. 김명원이 올린 장계로 ‘신각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는 내용이다.
신각은 부원수 자격으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았다. 당시 전황을 살핀 그는 물러나서 군사를 재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명원이 듣지 아니 하였고, 결국 방어 작전은 실패했다. 부원수 신각은 양주로 후퇴한 뒤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 그러던 중에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인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70명을 만나 그들을 참살했다. 소규모였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귀중한 승리를 거둔 장수다. 이런 장수를 선조는 처형하라고 명했다.
학자들은 김명원이 유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도원수라는 직책에 충실했고, 전시 행정가로서도 성실하고 유능했으며,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어쩌다가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들었다.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그는 이순신을 살려 낸다. 정유년에 선조는 이순신을 쳐 내려 작정했었다. 그때 이순신의 구명 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고, 천만다행으로 이순신은 재기용되었다. 신각과 이순신을 바꾼 꼴이 되었다.
그해 5월 18일 비변사에서는 “신각을 군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청했다. 파천 길에 오른 선조도 머뭇거림 없이 “처형하라”고 명했다.
얼마 후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선조는 부랴부랴 선전관을 보내며 “죽이지 말라”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무슨 일이건 신중해야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당시의 통신 수단으로 가장 빠른 것이 봉화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 시간은 아주 빠르면 2시간, 늦어도 12시간 정도 걸린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런 봉화를 통해 사태를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일본군은 조선이 미처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미친 속도로 진격해 왔다.
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침공으로, 패주하는 일선 장수들이 속출함에 따라 강경론이 제기된 시점에 신각이 걸려들었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재수의 있고 없음을 마음대로 못하지만 사람들은 재수 좋기를 추구한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선거철만 되면 정화수 떠놓고 두 손을 비볐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기도를 했다. 재수 좋으라고 그랬다.
그런데 재수 좋은 것 이전에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소소하고 작은 규정이라도 꼼꼼하게 챙기고 빈틈 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신각은 전시 규정을 어긴 것이 있다. 부원수로서 도원수를 수행하는 임무에 소홀했고, “즉시 보고하라”는 시간도 지키지 못했다. 평상시 같으면 눈감아 줄 만한 아주 미미한 사안이었지만 그것이 신각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빛나는 전공(戰功)마저도 땅 속에 묻히게 했다.
안타까운 이 사건에서 평범한 진리의 엄격함을 깨닫는다.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그 진리를 신각은 죽음으로 증명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둔 조선의 영웅들이 있다. 1592년 6월 16일의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신각을 비롯해 의병장 곽재우는 5월 24일의 정암진 전투에서, 권율은 7월 8일의 이치 전투와 1593년 2월 12일의 행주대첩에서 이겼다. 순수하게 조선인만을 이끌고 승리했다. 그런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장수가 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자 신각이다. 왜 그랬을까?
신각은 부원수 자격으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았다. 당시 전황을 살핀 그는 물러나서 군사를 재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명원이 듣지 아니 하였고, 결국 방어 작전은 실패했다. 부원수 신각은 양주로 후퇴한 뒤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 그러던 중에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인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70명을 만나 그들을 참살했다. 소규모였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귀중한 승리를 거둔 장수다. 이런 장수를 선조는 처형하라고 명했다.
얼마 후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선조는 부랴부랴 선전관을 보내며 “죽이지 말라”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무슨 일이건 신중해야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당시의 통신 수단으로 가장 빠른 것이 봉화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 시간은 아주 빠르면 2시간, 늦어도 12시간 정도 걸린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런 봉화를 통해 사태를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일본군은 조선이 미처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미친 속도로 진격해 왔다.
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침공으로, 패주하는 일선 장수들이 속출함에 따라 강경론이 제기된 시점에 신각이 걸려들었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재수의 있고 없음을 마음대로 못하지만 사람들은 재수 좋기를 추구한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선거철만 되면 정화수 떠놓고 두 손을 비볐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기도를 했다. 재수 좋으라고 그랬다.
그런데 재수 좋은 것 이전에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소소하고 작은 규정이라도 꼼꼼하게 챙기고 빈틈 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신각은 전시 규정을 어긴 것이 있다. 부원수로서 도원수를 수행하는 임무에 소홀했고, “즉시 보고하라”는 시간도 지키지 못했다. 평상시 같으면 눈감아 줄 만한 아주 미미한 사안이었지만 그것이 신각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빛나는 전공(戰功)마저도 땅 속에 묻히게 했다.
안타까운 이 사건에서 평범한 진리의 엄격함을 깨닫는다.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그 진리를 신각은 죽음으로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