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60주년을 기념하며
2020년 04월 17일(금) 00:00

이 병 열 4·19민주혁명기념사업회장

4·19 혁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최초로 민주화의 초석을 다진 역사로, 헌법 전문에 3·1 독립운동과 더불어 4·19 민주 이념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1960년 4·19 당시 광주 4·19를 주도했는데 60년 세월이 흘러 80대가 되었다 4·19 민주혁명 60주년을 맞아 당시를 회고한다.

4·19 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자유당 정권이 영구 집권을 위해 선거 당일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등 부정 선거로 국민 주권과 참정권을 박탈한 데서 발발되었다. 이에 분노한 전국 학생과 국민이 일제히 봉기해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제2 공화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과정은 1960년 3·15 부정 선거 반대 시위로 숨진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27일만에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그해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3·15 부정 선거 반대 시위를 하던 중 자유당이 정치 깡패를 동원해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전 국민이 분노하게 된다. 4월 19일에는 전국 대도시 학생과 국민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 다발적으로 ‘자유당 독재 정권 타도하자’ ‘3·15 부정 선거 다시 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당시 투석전과 총격전으로 사망 186명, 부상 602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광주에서는 광주고등학교 학생 열 명과 조대부고생 한 명이 4월 18일 밤 8시경 광주고 3학년 이홍길의 하숙방에서 4월 19일 1교시 시작과 동시에 난타 종소리에 따라 운동장에 집결, 각 고등학교로 달려가 봉기 사실을 알려 동참을 요청하도록 모의하였다. 타종수와 1·2학년 각반 선동자도 정하였다. 부고는 광고 봉기 사실을 전하면 동참키로 하였다.

그러나 모의 사실은 경찰로 새 나가 19일 아침 모의에 참가했던 학생 전원과 반장들은 교장실로 불려갔고 학교 교문은 경찰과 교사들이 봉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암암리에 전교생들 사이에 우리도 정의와 자유를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심전심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1교시가 끝나도 난타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2교시가 시작되자 필자 옆자리에 있던 정원채 학생이 선생님이 흑판에 글을 쓰는 순간 사전에 열어 놨던 뒷문으로 종을 치러 갔다. 잠시 후 10시 20분경 난타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광주 4·19의 시작종이 울린 것이다. 난타 종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교실에서 뛰쳐나와 운동장에 전교생이 집결하였고, 시내 각 고등학교로 달려가 광고 봉기 사실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키로 했다. 그때 교장실에 갇혀 있던 모의 참가자 및 반장들은 유리창문을 깨고 뛰쳐나와 합세했다. 3학년이 선봉에서 서서 시내 각 고등학교로 가기 위해 교문으로 달려갔다. 학생들이 경찰, 교사들과 승강이를 벌이다 교문을 무너뜨려 마침내 광주 4·19의 물꼬가 터졌다. 오전 10시 30분경이었다.

교문과 후문으로 나온 학생들 다수는 계림오거리 방향으로, 일부는 경양방죽이나 계림초교 방향으로 달려갔다. 다수 학생은 계림오거리에서 경찰의 강력 저지로 대열이 와해되면서 붙잡혀 갔다. 일부 학생들은 그 틈새를 빠져나가 전남여고와 광주여고, 공고, 조대부고, 숭일고, 수피아여고로 달려갔다. 다른 일부는 일고, 농고에, 또 다른 일부는 상고, 광주사범 등에 광고의 봉기 사실을 알리며 동참을 호소했다. 당시 각 학교는 경찰들이 지키고 있어 이를 피해 가며 활동했지만 공고 부근에서 많이 붙들려 갔다.

오후 2~3시경 광고와 부고, 공고, 상고, 숭일고, 광주여고, 농고는 전교 학생들이, 광주사범과 일고, 수피아, 전남여고는 소수의 학생이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 충장로를 뒤덮었다. 도청 앞까지 가는 과정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소방차가 물대포를 쏘자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수천의 피 끓는 학생들의 투석전을 제압하지 못했다.

오후 5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투석 목표는 정의와 자유를 억압하는 경찰서·파출소와 시위를 방해하는 소방서였다. 4월 19일 저녁 9시경 학생들은 당시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를 투석하고자 진격하였다.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을 쏴도 제압되지 않자 9시 20분 경찰 돌격대가 나와 실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추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 8명(경찰 1명 포함)과 부상자 59명이 발생했고 시위대는 쏟아지는 빗방울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다. 이로써 4월 19일은 민주화를 위한 희생의 역사로 길이 기억되게 됐고 그 중심에는 광주가 있었다.

광주는 불의에 항거한 3대 민중항쟁인 학생독립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등 자랑스런 역사 문화 자산을 갖고 있다. 우리는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이러한 문화 자산을 선양하고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치 등과 연계시켜 광주 발전의 에너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