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의 ‘고등’학생과 4·15의 고등‘학생’
2020년 04월 13일(월) 00:00 가가
라면을 자주 끓이게 된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르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라면을 끓이면 곡선과 직선을 만나게 된다. 마트에서 사 오는 여느 라면의 면발은 곡선이다. 이게 뜨거운 물에서 펼쳐져 직선에 가깝게 된다.
면발에서만 곡선과 직선을 만나는 건 아니다. 나는 라면에 계란은 넣지 않지만 대파는 꼭 넣는다. 그런데 송송 썬, 동그란 대파 조각은 넣지 않는다. 그건 된장국이나 우동에 어울리지 라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라면의 긴 면발에 어울리려면 대파 역시 길이가 있어야 한다. 나는 대파를 손가락 크기의 토막으로 잘라서 가로로 길쭉하게 썬다. 이런 대파는 처음에야 직선이지만 라면과 함께 끓이면 곡선이 된다.
라면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면 코로나19 못지않게 4·15 총선이 많이 나온다. 나는 선거 역시 라면 끓이기처럼 직선과 곡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여긴다. 평소에는 쉬 만나기 힘든, 그러니까 상당히 뻣뻣한 이들이 선거철에는 허리를 굽힌다. 직선이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유권자들은 어떤가? 전에는 권력자들을 만날 때 은연중에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고 해도 선거철이 되면 고개를 들고 악수한다. 곡선이 직선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라면의 맛은 곡선과 직선이 어울려 있을 때이다. 면발이 확 풀어져서 곡선의 느낌을 모조리 상실해 버려서도 안 된다. 곡선이 직선을 품고 있어야 한다. 대파 역시 너무 익어서 흐느적거리면 안 된다. 대파가 그 맛을 부드럽게 지니고 있을 때는 직선이면서 곡선을 품고 있는 때이다.
정치에서도 이런 곡선과 직선이 어울려 있어야 한다. 힘겨워하는 국민을 품어야 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곧은길을 제시해야 한다. 힘겨워하는 국민을 품는 데만 온통 정신을 쏟으면 포퓰리즘에 떨어져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다면서 힘겨워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건 개발 독재에 불과하다.
이번 4·15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이런 곡선과 직선이 잘 어울리는 세상이 되도록 투표권을 잘 행사하리라 믿는다.
이번 총선은 아주 중요하다. 어떤 선거든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이번 총선은 이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18세까지 선거권이 확대된 것이다. 이제 고등학생들도-일부이긴 하지만-정치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생들이 정치 전면에 나선 건 50년 전의 4·19이다. 전국에서 고등학생이 독재 정권 타도를 위한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에서는 단순히 참여한 정도가 아니었다. 광주고를 비롯한 다수의 고교에서 뛰쳐나온 고등학생이 시위를 주도했다. 서울의 경우 대학생이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광주에서는 고등학생이 그랬던 것이다.
4·19 혁명은 성공했으나 고등학생은 물론 20세 미만의 대학생도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선거권은 어른에게만 있었고 피선거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에 의해 성공한 혁명은 기성세대에게서 표류하다가 유실돼 버렸다.
그 후 이 나라 정치권은 고등학생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4·19 혁명에 참여했던 이들마저도 고등학생에게 선거권을 주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몇 년 전에야 18세 이상에게 선거권을 주는 일이 공론화됐고 작년에 가까스로 개정된 선거법이 통과됐다. 여기에 나이 든 이들 상당수가 반대했다. 왜 반대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이렇게 요약됐다.
‘1960년 당시 고등학생은 세상을 위해 고민한 지성인이었다. 지금의 고등학생은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에 불과하다.’
나는 예전에 ‘고등’학생이 있었고 지금은 고등‘학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19 당시의 고등학생이 독재 타도를 위해 시위에 나섰듯이, 지금의 고등학생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길을 찾아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새롭고 행동한다.
우리는 이번 총선에 참여하는 고등학생에게 우려보다는 기대를 가져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등학생은 이 나라의 기대이다. 이런 기대에 부응해서 4·15 총선에서 투표권을 가진 고등학생들이 어른들 못지않게 투표권을 잘 행사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가 끝날 때까지 라면도 계속 끓일 터이다. 곡선과 직선이 어울리는 걸 보면서.
면발에서만 곡선과 직선을 만나는 건 아니다. 나는 라면에 계란은 넣지 않지만 대파는 꼭 넣는다. 그런데 송송 썬, 동그란 대파 조각은 넣지 않는다. 그건 된장국이나 우동에 어울리지 라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라면의 긴 면발에 어울리려면 대파 역시 길이가 있어야 한다. 나는 대파를 손가락 크기의 토막으로 잘라서 가로로 길쭉하게 썬다. 이런 대파는 처음에야 직선이지만 라면과 함께 끓이면 곡선이 된다.
이번 4·15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이런 곡선과 직선이 잘 어울리는 세상이 되도록 투표권을 잘 행사하리라 믿는다.
이번 총선은 아주 중요하다. 어떤 선거든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이번 총선은 이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18세까지 선거권이 확대된 것이다. 이제 고등학생들도-일부이긴 하지만-정치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생들이 정치 전면에 나선 건 50년 전의 4·19이다. 전국에서 고등학생이 독재 정권 타도를 위한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에서는 단순히 참여한 정도가 아니었다. 광주고를 비롯한 다수의 고교에서 뛰쳐나온 고등학생이 시위를 주도했다. 서울의 경우 대학생이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광주에서는 고등학생이 그랬던 것이다.
4·19 혁명은 성공했으나 고등학생은 물론 20세 미만의 대학생도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선거권은 어른에게만 있었고 피선거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에 의해 성공한 혁명은 기성세대에게서 표류하다가 유실돼 버렸다.
그 후 이 나라 정치권은 고등학생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4·19 혁명에 참여했던 이들마저도 고등학생에게 선거권을 주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몇 년 전에야 18세 이상에게 선거권을 주는 일이 공론화됐고 작년에 가까스로 개정된 선거법이 통과됐다. 여기에 나이 든 이들 상당수가 반대했다. 왜 반대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이렇게 요약됐다.
‘1960년 당시 고등학생은 세상을 위해 고민한 지성인이었다. 지금의 고등학생은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에 불과하다.’
나는 예전에 ‘고등’학생이 있었고 지금은 고등‘학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19 당시의 고등학생이 독재 타도를 위해 시위에 나섰듯이, 지금의 고등학생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길을 찾아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새롭고 행동한다.
우리는 이번 총선에 참여하는 고등학생에게 우려보다는 기대를 가져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등학생은 이 나라의 기대이다. 이런 기대에 부응해서 4·15 총선에서 투표권을 가진 고등학생들이 어른들 못지않게 투표권을 잘 행사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가 끝날 때까지 라면도 계속 끓일 터이다. 곡선과 직선이 어울리는 걸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