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과 나주 남평의 봄
2020년 04월 10일(금) 00:00 가가
해남이 고향인 법정 스님은 말했다. “봄이 와 꽃 핀 게 아니라 꽃이 펴야 봄이다”라고. 이 말의 진의는 “봄이 와도 꽃이 없으니 봄 같지 않다”는 의미의 ‘춘래불사춘’이 확인시켜 주고 있는 듯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구례 산수유, 광양 매화, 여수 진달래 등의 남도 꽃소식이 전국으로 전해진다. 꽃향기에 매혹된 상춘객들로 남도 땅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올해는 코로나19라는 복병으로 인해 “꽃이 펴도 봄은 봄이 아니다”라고 비탄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래도 앞다퉈 꽃이 피어나는 봄이 왔기에 지면을 통해서라도 남도 꽃소식을 전하고 싶다. 그것도 필자의 일터가 있는 나주 남평 지역을 통해서 말이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찻집 귀천의 시인 천상병이 말했듯 문학의 왕이라는 시 몇 편을 봄소식에 넣었다.
얼마 전 읍내 드들강 제방에 심어진 산수유가 꽃을 활짝 피워 냈다. 산수유 꽃은 어느 산문집의 글귀처럼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 마치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였다. 물론 지리산 자락 산동마을의 군락진 산수유처럼 투명한 화려함은 없지만 봄의 전령사이기엔 부족함이 없다.
남평 드들강에는 두 개의 강변길이 있다. 하나는 강물에 인접한 흙길이고 다른 하나는 강변공원을 사이에 놓고 읍내를 보호하는 제방형 강변도로다. 어느새 강변 흙길에는 산보를 즐기는 가벼운 옷차림의 주민들과 강변공원 잡초 밭에서 냉이를 캐는 사람들이 부척 늘었다. 또 강변 물가에 듬성듬성 심어져 있는 버드나무에도 물이 올라, 남정 박노수 화백의 ‘유하’(柳下)라는 그림을 연상케 하는 연록 이파리들이 늘어진 줄기에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강변마을 남평의 봄을 생각하며 한 편의 시를 떠올렸다. 담양 출신 소요 태능 스님의 ‘문외음’(門外吟)이 그것이다. “산은 우뚝 솟아 있고/ 물은 차고/ 바람은 솔솔 불고/ 꽃은 그윽하게 피어 있고/ 다만 이렇게 살아라/ 뭣 때문에 힐끔 힐끔 세정을 엿보는가.” 사실 누구라도 강변 흙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강 건너 산들을 보며 강물을 스치는 바람을 쏘이고 주변의 꽃들을 보면 가히 여기가 ‘별유천지비인간’의 세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남평의 풍광 중 으뜸은 남석리에 있는 드들강 솔밭 유원지다. 그곳에는 조선시대 때 남평 현감 우성이 제방을 쌓고, 현감 백인걸이 강을 따라 소나무를 심었다는 십리송의 일부가 남아있다. 또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곡을 붙인 남평 출신 작곡가 안성현의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 근처에는 남평에 현존하는 네 정자 중 하나인 탁사정도 있다. 탁사정은 1587년 윤선기가 조성한 것이다. 탁사라는 당호는 굴원의 ‘초사(어부사)’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남평의 봄을 생각하면 또 다른 시 한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이단자로 불리었던 천재 허균(1569~1618)이다. 그가 남평에 자취를 남긴 곳은 앞서 말한 드들강 솔밭유원지로 추정된다. ‘남평읍지’에는 두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허균이 왜 남평까지 오게 된 것일까 하는 점이다. 1986년에 발표된 박종현의 논문 ‘실존 홍길동 연구’에 따르면 홍길동은 경성절제사를 지낸 홍상직의 셋째 아들이다. 물론 홍길동의 어머니는 관기 출신 비첩이다. 두 형의 어머니인 처가 바로 남평 문씨다. 그래서 남평이란 고장을 자못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실직 후 전라도 산천을 유람할 때 남평에 온 것이다. 시를 읽어본다. “한가로이 말을 타고 너른 들을 밟아가니/ 들 밖의 마을 집들 새로 지붕 이었구려/ 봄 저무니 언덕 꽃은 바람에 휘날리고/ 비가 개니 물오리는 모래톱에 노래하네.”
허균이 남평에 와서 느꼈을 남도의 봄소식과 현재의 봄소식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꽃 피어 남평의 봄은 다시 왔지만 드들강 유원지 그 어디서도 허균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여력이 된다면 안성현 노래비나 탁사정 근처 어디쯤에 허균의 시비도 하나 소박하게 세워 보면 어떨까. 허균의 문학적 자취가 어떤 형상을 통해 외부로 드러날 때 또 하나의 값진 문화적 자산이 축적되는 것이기에.
강변마을 남평의 봄을 생각하며 한 편의 시를 떠올렸다. 담양 출신 소요 태능 스님의 ‘문외음’(門外吟)이 그것이다. “산은 우뚝 솟아 있고/ 물은 차고/ 바람은 솔솔 불고/ 꽃은 그윽하게 피어 있고/ 다만 이렇게 살아라/ 뭣 때문에 힐끔 힐끔 세정을 엿보는가.” 사실 누구라도 강변 흙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강 건너 산들을 보며 강물을 스치는 바람을 쏘이고 주변의 꽃들을 보면 가히 여기가 ‘별유천지비인간’의 세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남평의 풍광 중 으뜸은 남석리에 있는 드들강 솔밭 유원지다. 그곳에는 조선시대 때 남평 현감 우성이 제방을 쌓고, 현감 백인걸이 강을 따라 소나무를 심었다는 십리송의 일부가 남아있다. 또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곡을 붙인 남평 출신 작곡가 안성현의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 근처에는 남평에 현존하는 네 정자 중 하나인 탁사정도 있다. 탁사정은 1587년 윤선기가 조성한 것이다. 탁사라는 당호는 굴원의 ‘초사(어부사)’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남평의 봄을 생각하면 또 다른 시 한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이단자로 불리었던 천재 허균(1569~1618)이다. 그가 남평에 자취를 남긴 곳은 앞서 말한 드들강 솔밭유원지로 추정된다. ‘남평읍지’에는 두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허균이 왜 남평까지 오게 된 것일까 하는 점이다. 1986년에 발표된 박종현의 논문 ‘실존 홍길동 연구’에 따르면 홍길동은 경성절제사를 지낸 홍상직의 셋째 아들이다. 물론 홍길동의 어머니는 관기 출신 비첩이다. 두 형의 어머니인 처가 바로 남평 문씨다. 그래서 남평이란 고장을 자못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실직 후 전라도 산천을 유람할 때 남평에 온 것이다. 시를 읽어본다. “한가로이 말을 타고 너른 들을 밟아가니/ 들 밖의 마을 집들 새로 지붕 이었구려/ 봄 저무니 언덕 꽃은 바람에 휘날리고/ 비가 개니 물오리는 모래톱에 노래하네.”
허균이 남평에 와서 느꼈을 남도의 봄소식과 현재의 봄소식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꽃 피어 남평의 봄은 다시 왔지만 드들강 유원지 그 어디서도 허균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여력이 된다면 안성현 노래비나 탁사정 근처 어디쯤에 허균의 시비도 하나 소박하게 세워 보면 어떨까. 허균의 문학적 자취가 어떤 형상을 통해 외부로 드러날 때 또 하나의 값진 문화적 자산이 축적되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