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크나큰 사랑
2020년 02월 24일(월) 00:00 가가
나에겐 팔순이 넘은, 세상에 둘도 없는 언니가 한 분 계신다. 여덟 살 터울이지만 언니는 나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시다. 6·25 전쟁 때 큰 오빠는 보성 회천지서에 근무하던 중 영암 월출산에 파견돼 북한군과 대치하다 전사하셨다. 어머님은 시신도 못 찾은 채 자식을 가슴에 묻고 한 많은 세월을 피눈물로 살다 보니 어린 나를 돌보고 챙기는 일은 온통 언니의 몫이었다. 19년간 면장을 하셨던 옥골선풍이신 우리 아버님은 학문과 인품을 고루 갖추신 분이셨다. 아버님께서는 해마다 현충일에 광주·전남 유가족 대표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장남의 제사를 지내셨다.
내가 고1 때 부모님께서 4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셨고 그 빈자리를 채워 주신 분은 은혜롭고 고마우신 형부와 언니였다. 교대를 졸업하고 발령을 받아 시골로 내려갈 땐 형부랑 신문사 동료이고 교육장님 형님이신 분이 승용차로 관사까지 나를 데려다 주셨다. 다음날에는 교육장님께서 나를 학교까지 직접 태워다 주셨다.
한 달에 한 번씩 광주에 오면 언니는 나를 목욕탕에 데려가서 씻겨 주고 충장로 양장점에서 옷도 맞춰 주고 머리도 다듬어 줬다. 덕분에 나는 세련된 멋쟁이 아가씨가 되었다. 해마다 학교 운동회날은 형부랑 언니가 그 먼 길을 승용차로 내려오셔서 싣고 온 선물도 주시고 기도 살려 주시고 자리를 빛내 주셨다. 형부께서는 날 무척 귀여워해 주시고, 칭찬으로 사기와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내가 언니 집에서 살 때 보람되고 자랑스런 일은 지금 의사인 언니 큰 딸을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졸업 때까지 날마다 기초 학습부터 심화 학습까지 전과목을 반복 지도한 일이다. 책도 많이 사 주고 독서 지도, 글쓰기 지도에 심혈을 기울였더니 글쓰기, 말하기 능력도 탁월했다. 총명하고 영특한 아이라서 학교에 다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의대까지 졸업하고 지금은 국내 유일한 성의학자로, 명성 높은 의사로 활약 중이다.
우리 형부는 지병인 결핵을 앓던 중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 드셨지만 당뇨까지 겹쳐 간간이 피를 토하셔서 서울에 근무하는 의사 딸이 여러 병원에 예약을 해 놓았지만 끝내 병원에 가시지 않고 운명의 날을 맞고야 말았다.
지금부터 30년 전, 1990년 음력 5월 8일 토요일 저녁 무렵 언니가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네 형부 돌아가셔야. 빨리 와라!”고 전화를 했다. 이웃에 사는 언니네 집으로 정신 없이 달려갔더니 형부께서 피를 토하시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 안절부절 허둥대다가 집 가까운 곳에서 친구들과 회식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연락했더니 쏜살같이 달려와서 의식이 없는 형부를 큰길까지 등에 업고 가서 구급차로 전대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들이 몰려와서 심폐소생술을 번갈아 했지만 좀처럼 의식이 깨어나질 않아 우리들은 속이 타들어 가고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가운데 안타깝게도 끝내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병원차로 형부 시신을 싣고 집에 왔는데 애들이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큰 충격을 받고 혼비백산했고 언니는 눈물마저 메마른 채 망연자실하였다.
언니가 우울증에 걸릴까봐 한 달 이상을 학교 퇴근 후 언니네 집으로 가서 밥도 차려 주고, 간식도 챙겨 주고 청소도 하면서 위로도 하고 용기도 북돋아 주었다. 큰 딸은 의사고 작은 딸은 보건소에 근무했지만 2남 2녀 모두 결혼도 안 했는데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갑자기 하늘 같은 아빠를 여읜 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워서 속울음을 터트렸을까 안쓰럽고 짠하다. 그래도 삐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잘 성장해 줘서 고맙기만 하다.
아버님 기일이나 명절 때면 엄마를 모시고 성묘하러 온 효자들이다. 생활력 강한 언니는 음식점을 하면서 두 아들을 대학교까지 졸업시키고 좋은 직장도 구하고 결혼도 모두 잘해서 걱정 근심 없이 잘 살고 있다. 이젠 호강 받을 일만 남았는데 2년 전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다.
팔순이 넘은 우리 언니는 나보다 전화를 자주 하는 살가운 분인데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서 전화를 못하시다가 내가 전화하면 “세상에 둘도 없는 내 동생인가!”라며 반색을 하신다. 내겐 세상에 둘도 없는 엄마처럼 소중한 분이시다.
사랑하는 우리 언니! 아프지 말고 건강한 몸으로 근심 걱정 없이 즐겁고 행복한 여생을 즐기시길 바랄게요. 언니를 애지중지하셨던 우리 형부! 백년해로 못다 하고 가셨지만 언니가 형부 몫까지 오래오래 사시도록 지켜 주실거죠?
우리 형부는 지병인 결핵을 앓던 중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 드셨지만 당뇨까지 겹쳐 간간이 피를 토하셔서 서울에 근무하는 의사 딸이 여러 병원에 예약을 해 놓았지만 끝내 병원에 가시지 않고 운명의 날을 맞고야 말았다.
지금부터 30년 전, 1990년 음력 5월 8일 토요일 저녁 무렵 언니가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네 형부 돌아가셔야. 빨리 와라!”고 전화를 했다. 이웃에 사는 언니네 집으로 정신 없이 달려갔더니 형부께서 피를 토하시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 안절부절 허둥대다가 집 가까운 곳에서 친구들과 회식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연락했더니 쏜살같이 달려와서 의식이 없는 형부를 큰길까지 등에 업고 가서 구급차로 전대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들이 몰려와서 심폐소생술을 번갈아 했지만 좀처럼 의식이 깨어나질 않아 우리들은 속이 타들어 가고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가운데 안타깝게도 끝내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병원차로 형부 시신을 싣고 집에 왔는데 애들이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큰 충격을 받고 혼비백산했고 언니는 눈물마저 메마른 채 망연자실하였다.
언니가 우울증에 걸릴까봐 한 달 이상을 학교 퇴근 후 언니네 집으로 가서 밥도 차려 주고, 간식도 챙겨 주고 청소도 하면서 위로도 하고 용기도 북돋아 주었다. 큰 딸은 의사고 작은 딸은 보건소에 근무했지만 2남 2녀 모두 결혼도 안 했는데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갑자기 하늘 같은 아빠를 여읜 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워서 속울음을 터트렸을까 안쓰럽고 짠하다. 그래도 삐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잘 성장해 줘서 고맙기만 하다.
아버님 기일이나 명절 때면 엄마를 모시고 성묘하러 온 효자들이다. 생활력 강한 언니는 음식점을 하면서 두 아들을 대학교까지 졸업시키고 좋은 직장도 구하고 결혼도 모두 잘해서 걱정 근심 없이 잘 살고 있다. 이젠 호강 받을 일만 남았는데 2년 전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다.
팔순이 넘은 우리 언니는 나보다 전화를 자주 하는 살가운 분인데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서 전화를 못하시다가 내가 전화하면 “세상에 둘도 없는 내 동생인가!”라며 반색을 하신다. 내겐 세상에 둘도 없는 엄마처럼 소중한 분이시다.
사랑하는 우리 언니! 아프지 말고 건강한 몸으로 근심 걱정 없이 즐겁고 행복한 여생을 즐기시길 바랄게요. 언니를 애지중지하셨던 우리 형부! 백년해로 못다 하고 가셨지만 언니가 형부 몫까지 오래오래 사시도록 지켜 주실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