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와 싱글맘
2020년 02월 18일(화) 00:00 가가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혀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맥락을 모르고 듣는다면, 법정에서 온정적인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판사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로나 여겨질 법하다. 하지만 이 말은 종합편성 채널 한 곳에서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래 경연대회 최종 우승자의 입에서 나온 우승 소감이다. 사전에 준비된 것이 아니라면, 이 말 속에는 그동안 안으로만 삭여 왔음직한 우승자의 어떤 심정이 배어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게 미치자, 여섯 살 된 아이 하나를 혼자 키우는 30대 싱글맘이라고 했던 우승자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한부모 가정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은 이른바 ‘정상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아직도 ‘정상적’이지 못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싱글맘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더 굽어 있다. ‘편부 슬하’란 말은 없어도 편모슬하라는 말은 있다는 사실이 이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보여 준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소리를 들으면, 여자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한다든가 까닭 없이 쉬이보려 한다. 이런 주위의 날선 시선들 속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려니 남모를 어려움과 설움도 많았을 것이다. 경연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을 때 방송에서 싱글맘이라는 게 공개되면 자신은 괜찮지만 혹시나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점이 제일 망설여졌다는, 우승 후 다른 지면에서 실린 우승자의 인터뷰에서도 그런 굽은 시선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읽혔다.
인정(仁政)을 최고의 정치로 여겼던 유교 사회에서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국가의 책무로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鰥)와 과부(寡)와 고아(孤)와 자식이 없는 노인(獨)에 대한 구휼은 언제나 정치가 제일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동양적 이상사회의 청사진으로 많이 일컬어지는 ‘예기’(禮記)의 대동사회론에도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고, 맹자 또한 이들에 대한 보호가 왕도정치의 시금석이라고 주장하였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 교서에서 이들에 대한 구휼이 왕도정치 구현의 관건적인 과제임을 천명하고 있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유교의 이런 생각에는 ‘정상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로놓여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혼기가 차면 배우자를 만나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늙도록 부부가 해로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보는 관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환과고독은 삶의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를테면 ‘비정상’이고 따라서 극복되거나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통 유교 사회는 늘 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들 소수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보살핌을 통치자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전통사회에서나 있었던 케케묵은 편견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를 구시대적인 편견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해 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는 것일까? 환과고독 가운데 ‘과’(寡)에 해당하는 오늘의 싱글맘들은 어제의 ‘과부들’에 비해 더 낳은 사회적 지위와 배려를 받고 있는 걸까?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우승 소감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지구는 만원이라면서 ‘둘도 많으니 하나만 낳아 알뜰살뜰 살라’더니 왜 어느 날부터 ‘낳을수록 희망 가득이고 기를수록 행복 가득’이라고 하는지 그 심오한 곡절은 잘 모르겠지만, 나라가 결혼과 출산을 권장하려면 적어도 인정(仁政)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지는 않고 인구절벽이 어떻네, 이런 출산율이라면 300년 후에는 나라가 없어지네 하며 호들갑만 떨어서야 되겠는가? 아니 도대체 결혼을 해라 말아라, 아이를 낳아라 말아라 할 권리가 나라에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는 피부에 와 닿는 부분부터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이 순리이다. 적어도 노래 경연에서 우승한 싱글맘의 입에서 ‘살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지 않고 우물에서 숭늉만 찾는 식이어서는 인구 증산 정책은 언제나 연목구어일 것이다. 나라도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유교의 이런 생각에는 ‘정상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로놓여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혼기가 차면 배우자를 만나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늙도록 부부가 해로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보는 관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환과고독은 삶의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를테면 ‘비정상’이고 따라서 극복되거나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통 유교 사회는 늘 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들 소수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보살핌을 통치자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전통사회에서나 있었던 케케묵은 편견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를 구시대적인 편견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해 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는 것일까? 환과고독 가운데 ‘과’(寡)에 해당하는 오늘의 싱글맘들은 어제의 ‘과부들’에 비해 더 낳은 사회적 지위와 배려를 받고 있는 걸까?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우승 소감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지구는 만원이라면서 ‘둘도 많으니 하나만 낳아 알뜰살뜰 살라’더니 왜 어느 날부터 ‘낳을수록 희망 가득이고 기를수록 행복 가득’이라고 하는지 그 심오한 곡절은 잘 모르겠지만, 나라가 결혼과 출산을 권장하려면 적어도 인정(仁政)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지는 않고 인구절벽이 어떻네, 이런 출산율이라면 300년 후에는 나라가 없어지네 하며 호들갑만 떨어서야 되겠는가? 아니 도대체 결혼을 해라 말아라, 아이를 낳아라 말아라 할 권리가 나라에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는 피부에 와 닿는 부분부터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이 순리이다. 적어도 노래 경연에서 우승한 싱글맘의 입에서 ‘살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지 않고 우물에서 숭늉만 찾는 식이어서는 인구 증산 정책은 언제나 연목구어일 것이다. 나라도 염치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