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에서 산다는 것은
2020년 02월 17일(월) 00:00 가가
어린 시절, 일명 열 고개, 스무고개 놀이를 하였다. 이런 식이다. 사회자가 “이번에는 지역 맞추기입니다”라고 말한 후 슬며시 힌트를 준다. ‘의병’ ‘상유십이’(尙有十二) ‘나철’ 등등.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홉 고개쯤 ‘꼬막’, 열 고개에서 ‘녹차’ 가 나오면 그제서야 손을 드는 이들이 많아진다. ‘보성’이라는 답을 맞추면 연필 두 자루를 상품으로 주는 놀이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굳이 열 고개 얘기를 꺼낸 이유는 ‘키위’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지난 1월 1일자로 보성 부군수로 부임한 이후 업무 파악을 하는 중에 보성군이 키위를 252ha에서 4500t을 생산하여 전국 1위라는 통계를 접했다. 순간 멍했다. 마트에서 아주 가끔 사먹던 키위를 보성에서 제일 많이 생산한다고? 필자가 무식한 건지, 보성군에서 그동안 비밀로 해 온 건지 헷갈리는 순간이었다.
그래 가깝기로는 아내 그리고 친구, 동료에게 ‘보성 키위’를 아냐고 물으니 반응은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주위 사람의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보성군이 이를 비밀로 감춰뒀던지 두 가지 중 하나이리라. 이제는 모두에게 공개한다. ‘보성하면 키위’ ‘키위하면 보성’을 머릿속에 입력해 놓으셨으면 한다. 혹여 첫 고개 단어로 ‘키위’하고 주어지면 곧바로 ‘보성’하고 답이 나오게끔 말이다.
실상 먹어보니 맛도 일품이다. 레드 키위, 골드 키위, 그린 키위 등 세 가지 키위를 놓고 맛을 비교하며 먹어 보는 호사를 누린 바 있는 필자는 참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다음은 ‘보성 의병’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국난에 어느 지역이라도 의병이 넘쳐 났지만 보성 의병이 단연 돋보인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호남 의병수 904명 중 64명으로 기록돼 있다. 전남 의병 숫자가 904명인 자체가 말이 안되기에 보성군은 2018년에 임진왜란부터 한말까지 의병과 의병 관련 인물을 발굴한 ‘보성의병사’를 발간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777명이다.
장인어른(방진)을 보성 사람으로 둔 이순신 장군께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고 선조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던 곳이 보성 읍내 열선루이고, 조성면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확보해 군사를 모아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밑바탕이 된 곳 역시 보성이다.
이 외에도 광해군의 스승이자 전라좌도 의병을 창의한 죽천 박광전 선생, 뒤를 이은 임계영 의병장, 해상의병장 전방삭 장군, 모의장군 최대성, 안방준 의병장 등이 있다. 그뿐인가. 가까이로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선생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이자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 박사도 있다. 한말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담살이(머슴) 의병장 안규홍,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전통 음악을 오선보로 지켜 냈던 민족음악가 채동선 등 이름 있는 자로 또는 이름 없는 자로 나라를 위해 많은 분들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 이곳 보성이다. 그러니 보성군을 상징하는 ‘의향, 예향, 다향’ 중 ‘의향’을 그 첫머리에 놓지 않았겠는가.
끝으로 보성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보성 사람 이야기를 꺼내 놓자면, 부임하면서 막연하게 억세고 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지역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씻겨 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사람이 왜 이리 순박하고 시골의 그윽한 정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도시화가 늦었기에 그러하다는 이야기로 치부할 이유는 없다. 훗날 2023년 호남고속철도가 보성역에 굉음을 내지르며 다닐 때에도 간직하고 있을 본래의 품성이지 않겠는가.
“명마는 낙인으로 알고 사랑은 눈빛으로 안다”는 말이 있으나 보성에 산다는 것은 낙인과 눈빛마저 필요 없는 것임을 새삼 확인한다.
다음은 ‘보성 의병’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국난에 어느 지역이라도 의병이 넘쳐 났지만 보성 의병이 단연 돋보인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호남 의병수 904명 중 64명으로 기록돼 있다. 전남 의병 숫자가 904명인 자체가 말이 안되기에 보성군은 2018년에 임진왜란부터 한말까지 의병과 의병 관련 인물을 발굴한 ‘보성의병사’를 발간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777명이다.
장인어른(방진)을 보성 사람으로 둔 이순신 장군께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고 선조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던 곳이 보성 읍내 열선루이고, 조성면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확보해 군사를 모아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밑바탕이 된 곳 역시 보성이다.
이 외에도 광해군의 스승이자 전라좌도 의병을 창의한 죽천 박광전 선생, 뒤를 이은 임계영 의병장, 해상의병장 전방삭 장군, 모의장군 최대성, 안방준 의병장 등이 있다. 그뿐인가. 가까이로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선생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이자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 박사도 있다. 한말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담살이(머슴) 의병장 안규홍,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전통 음악을 오선보로 지켜 냈던 민족음악가 채동선 등 이름 있는 자로 또는 이름 없는 자로 나라를 위해 많은 분들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 이곳 보성이다. 그러니 보성군을 상징하는 ‘의향, 예향, 다향’ 중 ‘의향’을 그 첫머리에 놓지 않았겠는가.
끝으로 보성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보성 사람 이야기를 꺼내 놓자면, 부임하면서 막연하게 억세고 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지역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씻겨 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사람이 왜 이리 순박하고 시골의 그윽한 정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도시화가 늦었기에 그러하다는 이야기로 치부할 이유는 없다. 훗날 2023년 호남고속철도가 보성역에 굉음을 내지르며 다닐 때에도 간직하고 있을 본래의 품성이지 않겠는가.
“명마는 낙인으로 알고 사랑은 눈빛으로 안다”는 말이 있으나 보성에 산다는 것은 낙인과 눈빛마저 필요 없는 것임을 새삼 확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