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 따라 찾아가는 예술가들의 문화공간 이색풍경
2020년 01월 28일(화) 00:00
[우리 동네에는 예술가가 산다] 제주 유일 문화지구 ‘저지예술인마을’
김흥수 아뜰리에·데이지 갤러리
제주현대미술관·김창열 미술관 등
예술인 30여명 곶자왈에 둥지
감성 충만 대표적 예술인 마을
독특한 건축미 자랑 문화공간 발길
‘느림과 비워냄’ 제주 새 명소로

저지예술인마을의 이정표

제주도가 매력적인 건 아름다운 자연 풍광 덕이 크다. 사계절 에머럴드 빛 바다와 오름 등 이색적인 지형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중에서도 곶자왈은 제주다움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곳. 제주 방언으로 덩굴과 암석이 뒤섞인 숲을 뜻하는 곶자왈은 거칠고 황량한 중산간마을에 많이 분포돼 있다.

이런 곶자왈을 품고 있는 마을이 있다. 지난 2010년 제주도내 유일의 문화지구로 지정된 저지문화예술인마을(제주시 현경면 저지리)이다. 한때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척박한 시골마을이었지만 예술인 30여 명이 둥지를 튼 이후 문화가 살아 숨쉬는 제주도의 명소로 되살아나고 있다.

저지예술인마을의 거점공간인 제주현대미술관 입구.
저지예술인마을은 방문객에게 쉽사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면 울창한 나무 옆에 자리한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이정표만 달랑(?) 보일 뿐 인적을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포장되지 않은 흙길과 현무암 돌담을 따라 마을 입구를 지나면 산책로가 나온다. 이때부터 범상치 않아 보이는 건축물과 갤러리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김흥수 아뜰리에’라는 간판이 선명한 2층 건물에서 부터 데이지 갤러리, 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분관(박광진 화백 전시실) 등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문화공간들이 발길을 붙든다. 특히 제주현대미술관의 야외조각공원과 김창열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오븟한 길은 일상의 번잡에서 벗어나 산책하기에 좋다. 이곳에서는 마치 시계가 멈춘 듯 모든 게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다. 방문객들은 ‘빠름과 채움’으로 점철된 세상으로 부터 ‘느림과 비워냄’의 공간과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저지예술인마을이 제주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지예술인마을에선 방향을 잃어도 전혀 헤맬 필요가 없다. 길이 갈라지는 곳 마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이정표가 예술작품 처럼 서 있다.

‘먹글이 있는 집’, ‘장정순 갤러리’, ‘평정지예’(FENG STUDIO·중국작가), 박광배(사진가), 박서보(화가), 고영훈(화가), 양순자(몽생이), 이송자(송뢰헌), 김현숙(현 갤러리), 강경희(음악가) 등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트리가 예술인들의 집으로 안내한다. 제주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는 색다른 풍경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 들인다.

저지예술인마을에는 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분관, 박광진화백 작업실, 데이지 갤러리등 문화공간과 예술인 3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박서보 화백 스튜디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박서보(88) 화백의 스튜디오다. 제주현대미술관 뒷편에 자리한 박 화백의 집은 깔끔한 화이트톤의 2층 건물이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외관인 거장의 저택은 아직 채워 넣을 게 많아 보이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게 초창기 제주도로 부터 택지를 분양받은 그는 이곳에 작은 미술관과 게스트하우스를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날씨가 좋은 여름철에 이 곳에 머문다는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오가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펴고 있다.

두번째 방문지는 지난 2016년 개관한 도립김창열 미술관이다. 저지예술인마을의 구심체이기도 한 이 곳은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김 화백이 일생을 바쳐 가꿔온 예술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박서보 화백과 함께 분양을 받은 그는 미술관 건립을 제안한 제주도에 지난 2013년 자신이 소장하던 작품 중 220점을 엄선해 기증했다.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제주에 들어선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김 화백은 평안남도 맹산 출신이지만 6·25전쟁 당시 1년 6개월가량 제주에 머물렀던 인연을 갖고 있다.

지상 1층, 연 면적 1597㎡ 규모의 김창열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그가 물방울을 캔버스에 그리는 건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보내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미술관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한자 돌아올 회(回) 모양이다. 김 화백은 그 중심인 빛의 중정이란 공간에 분수를 설치해 물방울을 표현했다. 이처럼 저지예술인마을을 둘러보는 또 다른 재미는 작가와 작품이 녹아 있는 예술적인 건축물이다.

제주현대미술관은 저지예술인마을의 대표적인 예술공간이자 플랫폼이다. 지난 2007년 지역 최초의 도립미술관으로 개관한 이후 매년 전국에서 10만 여 명이 다녀가는 전국구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근의 저지예술인마을과 10여개의 갤러리들이 제주현대미술관과 김창열미술관의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데 이는 미술관 관람객 가운데 상당수가 저지예술인마을을 둘러보기 때문이다. 방문객을 향해 악수를 청하는 듯 손을 내밀고 있는 커다란 조각상이 보이는 들머리를 지나 미술관에 들어서면 김흥수(1919~2014) 화백의 작품이 전시된 상설전시관과 일반 전시관이 나온다.

데이지 갤러리 전경.
저지예술인마을에서는 예술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크고 작은 갤러리들도 만날 수 있다. 갤러리 현, 갤러리 진, 데이지 갤러리 등이 대표적인 곳으로 회화, 사진, 조각, 공예 등 장르도 다양하다.

이 곳에서 만난 데이지 갤러리 관장 장지훈(저지예술인마을 주민협의체 사무국장)씨는 지난 2016년 광주살이를 접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케이스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평소 관심이 많은 예술을 인생 2막으로 선택한 그는 제주현대미술관 등 주변의 미술관 인프라와 인접해 있는 저지예술인마을에 갤러리를 건립하게 됐다. 오랜 세월동안 수집해온 컬렉션이 갤러리 관장으로 변신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특히 그가 저지예술인마을에 정착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정부가 지정한 문화지구라는 가치 때문이다.

“국내에는 서울 인사동, 대학로, 인천 개항장, 파주 헤이리와 함께 제주 저지예술인마을이 문화지구로 지정돼 있어요. 예술인들이 어울려 있다 보니 일상이 곧 예술이고 정기적으로 전시회나 공연, 축제를 통해 소통할 수 있어 갤러리 운영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실제로 저지예술인마을은 매년 가을철에 예술인들이 참여하는 ‘아트앤저지 2019’ 축제를 개최한다. 지난해 축제에서는 11개 개인 갤러리에서 회화, 서예, 조각, 공예, 도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비롯해 패션쇼, 음악회 등이 펼쳐졌다. 또한 제주현대미술관 잔디밭에서 진행된 아트마켓과 플리마켓은 입주 작가들의 예술품과 다양한 소품들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장터이기도 하다.

/제주=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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