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
2019년 09월 16일(월) 18:55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태풍이 할퀴고 간 들판이 휑하니 황량하다. 원래부터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작정을 하고 만든 것이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그 파괴력이 의외로 커서 오랫동안 생각을 같이 해 왔던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링링이 아니라 조국 이야기이다. 태풍의 눈은 자녀 교육과 재산 문제를 넘나들었고, 최종적으로는 문제 해결 방안이 대학 입시제도 개혁으로 귀착된 듯하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싸운 사례가 주변에 허다하다. 이 태풍은 권력의 정당성을 도덕성에 의지하고 있던 정부와 여당에 큰 상처를 남겼다. ‘강남 좌파’를 포함한 지지 기반이 많이 무너져 내렸고, 정치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커졌다. 보수 야당도 비슷한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지지 기반인 중상류층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을 뿐 아니라 야당의 유력한 무기인 청문회 자체의 무용론을 확산시켰다. 더 큰 패배자는 국민들이었다. 자신들의 자화상을 미워하게 되었고,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국내외적 도전과 우리의 대응 자세에 대한 자성의 기회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은 흔들리는 한국 사회의 국제적 위상과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을 냉정하게 점검해 볼 시점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추진했던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 교류 협력을 통한 평화의 정착, 일자리 창출을 통한 성장 동력의 회복, 정부 출범 시 약속했던 분권과 협치. 이런 목표들이 얼마나 달성되었으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인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한일 갈등이나 오래 지속되고 있는 한중 불신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남은 2년 반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게 하려면 시민들이 좀 더 차분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통하여 평화의 제도화를 화려하게 연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실속이 거의 없다.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도 아득하다. 결단의 기회를 놓쳤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필자는 정상회담을 통한 위로부터의 해결이라는 틀에 모든 것을 맡긴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을바람이 불면서, 북의 최선희 부상은 북미 대화 재개 신호를 보냈고,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 보좌관을 해임하면서 이에 화답하는 자세를 취했다. 일본 대표단은 평양을 방문하여 관계 개선을 위한 장애물 제거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한 달 후로 다가온 평양의 월드컵 예선 경기가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정부가 문제 해결의 키를 다시 쥐려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힘과 옆으로 확산되는 힘을 한데 모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결단할 수 있다. 조국 태풍이 보여 준 공정성에 대한 범사회적 요구는 대단한 것이었다. 문제는 사회의 여러 집단들이 생각하는 공정성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일부에서는 기회의 공정성을 말하고 일부에서는 능력에 따른 분배의 공정성을 말한다. 우리가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제도 개혁을 시도해 왔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주목하게 된 대학 입시 공정성 문제의 원천은 입시제도 자체보다는 고등학교와 대학의 서열 구조에 있다고 생각되지만, 불행하게도 이 정부는 대학 구조 개혁과 학문 정책에 손을 놓아 버렸다. 교육 개혁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론화를 통한 연구중심대학의 육성과 연구중심대학 학부의 완전한 지역균형 선발도 한 가지 방안으로 보인다. 최근의 한국 정치는 갈수록 원한의 악순환에 빠져들어 가는 듯하다. 촛불 혁명에서 상당한 합의를 이루었고,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공약으로 제시된 분권과 협치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최근 2년 반 동안 지방정부의 자율성이 제고되고, 장관들이 책임지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권력이 예전처럼 청와대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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