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다큐소설 광주 아리랑 <1>] 5월 14일 ‘다치지는 마라’
2019년 09월 11일(수) 04:50
사십대 초반의 사내가 책상 옆의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문에는 연신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수막이 생긴 창문에 사내의 얼굴이 어렸다. 사내는 어른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두 눈은 선명했다. 눈빛이 두 눈 안에 갇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눈 같았다. 저것이 내 얼굴이란 말인가. 창문에 그림자처럼 어린 얼굴이 현재의 자신은 분명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자신의 구겨진 과거의 얼굴이라면 모를까. 과거의 얼굴은 늘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현재의 얼굴에 만족하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강박관념처럼 흘러내리는 빗방울도 사내의 눈빛을 지우지는 못했다. 사내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직원 하나가 말했다.

“과장님, 정문에 나가보겠습니다.”

“비가 오는디도 학생들이 모여부렀는가?”

“오늘은 공대생들이 주도하고 있다는디요.”

“나도 곧 갈 틴께 몬자 나가보게.”

책상 위에는 명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학생과장 서명원’ 사내는 답답하여 창문을 조금 열었다. 봄날의 신선한 공기가 밀고 들어왔다. 더불어 정문 쪽에서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먼저 나간 직원이 걱정스러웠다. 교직원과 학생들 간에는 기묘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서로 믿지 못한 지 오래됐다. 학생들은 교직원들이 정보과 형사처럼 자신들의 행동을 감시한다고 의심했다. 교직원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억울해했다.

사내는 창문을 닫았다. 신선한 공기가 곧 차갑게 느껴졌던 것이다. 창문에는 다시 수막이 생기고 사내의 두 눈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사내는 의자에 앉은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문득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집을 지켰고 아버지는 집 밖으로 늘 떠돌았던 분이었다. 집안을 힘들게 했지만, 아버지가 외롭고 슬플 때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버지에게서 위안 받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떠오르는 것일까. 두 가지 다일까. 사내의 심사는 이내 복잡해져버렸다. 아버지는 강력한 자석처럼 사내를 끌어당겼다. 사내는 아버지의 기억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했다.

사내가 태어난 곳은 담양군 남면 청계동.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가 집을 떠나버리자 할아버지는 일본경찰과 헌병의 눈을 피해 산골 깊숙한 오지 마을로 숨어들었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본부인이 집을 나가버린 까닭에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재혼하도록 독촉했다. 아버지는 사내가 태어난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비밀리에 맡은 임무는 독립운동 자금조달이었다. 광주와 담양의 부잣집을 돌아다니면서 자금이 모아지면 한약재인 목단뿌리 장사로 변장하여 만주를 오갔다. 아버지는 전통의학인 단방약 요법에 능숙하기도 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한방서적 원문을 읽으며 스스로 터득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어학에도 소질이 있어서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조금씩 구사할 줄 알았다. 아버지 방 서가에는 외국어 서적 몇 권이 꽂혀 있었다. 아버지 방을 본 마을사람들은 아버지가 수재라고 했다. 융통성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한번 옳다고 믿으면 좀처럼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고집을 부리면 절대로 꺾지 않았다.



8.15해방 후.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함께 도모했던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지자 비통한 마음으로 오열하며 세상을 등졌다. 자식들에게 기대할 뿐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큰형은 5남매 중에서 가장 명석했다. 아버지처럼 글씨도 바르게 또박또박 잘 썼다. 대학은 납부금이 적은 사범대학을 갔다. 그리고 사범대학을 졸업한 큰형은 사병 입대했는데 영어를 잘하여 부대에서 통역을 하며 복무했다. 제대하고 나서는 한때 미국유학을 꿈꾸었으나 아버지 반대로 접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큰형에게서 이루려고 했다. 신익희 선생에게 보내면서 소개장을 써주었다.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였다. 큰형은 신익희 선생을 외호하는 예비경무대에 들어갔다. 예비경무대는 여섯 명으로 구성된 친위 핵심조직이었다. 더불어 큰형은 호남 조직참모로 일했다. 그러나 신익희 선생이 갑자기 별세하고 그 충격으로 큰형마저 뇌일혈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꿈은 또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사내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작은형으로 또 이어졌다. 6.25전쟁이 나자,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작은형은 고향 집으로 피난을 왔다. 그런데 경찰에게 이유 없이 폭행당한 뒤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거기에다 결혼한 작은누나마저 젖이 곪아 썩는 유종으로 죽자, 결국 5남매 중에 큰누나와 막내인 사내만 살아남았다.

증조할아버지 때만 해도 사내의 집은 부농이었는데, 할아버지가 그 논밭을 지키지 못했고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했던 데다, 해방 후 집안의 희망이었던 큰형과 작은형이 요절한 바람에 가세는 보잘것없이 돼버렸다. 따라서 사내는 힘들게 주경야독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채 검정고시를 본 뒤, 1959년 성균관대학 법정대학에 입학했다. 3학년 2학기 때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무등산 자락에 있는 풍암정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시공부도 찌든 생활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할 수 없이 사내는 농촌지도요원 선발시험을 보았고 합격해서 농촌지도요원이 됐다. 작은 월급이라도 받으니 생활형편은 나아졌지만 동료들의 비리를 보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사표를 쓰고 또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사내는 마침 5.16쿠데타 직후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는 국민운동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마침 전남도지국 상임간사 모집시험이 있어서 응시해 합격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정부 주도의 국민운동이 민간주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비판이 거세지자, 전격적으로 국민운동본부가 해체됐다. 그러면서 정부는 국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시청, 군청, 동사무소 등에 배치했다. 사내는 광주시청 관할의 동사무소로 갔다. 동사무소에서 얼마 후 일을 잘한다고 평가받아 시청으로 올라갔다. 시청에서 맡은 일은 지적사무였다. 이권이 개입하는 사무였다.

사내는 심한 갈등을 겪다가 사표를 내고 다시 공무원 시험을 봤다. 희망은 문교부에서 교육행정 일을 하고 싶었다. 그의 희망대로 1968년 1월 전남대학교 농대 서무과로 발령이 났다. 이후 본부 교무과, 문리대 서무과, 학생과, 후생과, 전남대부속중학교 서무과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이때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소문이 났던지 운동권 학생들이 사내를 따랐다. 아마도 문리대 사학과 변극 교수가 소문을 냈을 터였다. 아버지는 중국 상해에 있던 변극 선생과 주로 연락을 취했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사내를 큰형님이나 아저씨처럼 따르면서 돈을 빌려가거나 동아리모임에서 한 마디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1974년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당한 윤한봉이 찾아와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며 돈을 빌려갔다. 그 일로 사내는 고초를 겪었다.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직원에게 호되게 당했는데, 학생운동 자금을 대줬다는 이유였다. 그로 인해 사내는 학생과에서 후생과로 보내졌다. 그리고 1979년에는 전대 의대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몇 달 후 10·26 박정희 시해사건이 났다. 10·26사건이 나고 나서는 학생들과 학교 당국 간에 대화가 단절되고 말았다. 그동안 쌓였던 학내 문제, 어용교수 및 학생자율화 등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당국에서는 학생회 간부들과 대화할 수 있는 교직원을 물색했다. 또 다시 사내가 거론됐다. 민준식 총장이 사내를 불렀다.

“학생들이 학교측에 불만이 많아 얘기가 잘 되지 않고 있소. 그러니 당신이 대화통로를 쪼깐 열어야겄소.”

“제 힘으로 애러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렇소?”

“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야 직접 선배가 되니까 얘기가 더 잘 통할 것입니다. 저는 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일할 수 있겄습니까? 또 학생들과 얘기하려면 유관기관과도 잘 연결될 수 있고 성격이 원만한 사람이 맡아야지 저 같은 사람은 안 맞을 것 같습니다.”

사내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총장은 1980년 3월 18일자로 전남대 상담지도관 실장으로 정식발령을 내버렸다. 당시 상담지도관실에는 상담지도관이 한 사람 있고, 중고등학교 교사로 구성된 다섯 명의 상담지도사가 있었다. 또 그 밑에는 행정을 보는 직원 네 명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담지도관실에 화염병이 날아와 불이 났다. 상담지도관들에게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감시했던 기구인 상담지도관실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파면하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학교 측에서 상담지도관과 상담지도사들을 각 기관으로 파견 보냈다. 행정을 보는 네 사람이 남아서 일을 보는데 책임자가 없으니 업무가 밀렸다. 이런 이유로 사내가 상담지도관 실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사내가 부임한 뒤로 학생들의 항의는 전보다 덜했다. 사내는 기구를 다시 정비하고 건전한 직원들을 배치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뒷바라지를 주로 했다. 10.26 이후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총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거관리위원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때 정부조직기구의 국립대학교 설치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의 여망에 부응한다고 하여 상담지도관실을 없애고 장학담당관실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사내는 장학담당관 직무대리로 발령이 났다.

기구 명칭이 어찌됐든 사내가 학생회 간부들과 가장 많이 얘기한 주제는 어용교수 축출 문제였다. 사내는 어용교수를 축출하자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방법은 달랐다. 먼 훗날 스승을 쫓아냈다는 오명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학생들을 설득했다. 학생 주도로 축출하지 말고 유신기간에 권력과 밀착했던 교수와 교직원들이 스스로 사표를 내게 하자는 것이 사내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직원을 내면 그 행위로 끝내고 사표수리는 하지 말자고 학생들을 설득했다. 사직원을 낸다는 것은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증거가 되므로 굳이 축출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반성하고 잘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사내와 학생회 간부들의 뜻을 이해한 교수들은 사직원을 냈는데 끝내 명분과 위신 등을 내세워 안 낸 교수는 5, 6명이었다.

전남대의 경우 어용교수 축출문제가 그런대로 해결이 되자, 시위는 점점 사회문제로 돌아갔다. 그 분기점의 날이 5월 14일이었다. 12.12사태 이후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등 요직을 맡으면서 잠복해 있던 민주화에 대한 요구였다. 5월 초부터 학생들의 시위구호가 바뀌었다. ‘계엄령을 철회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노동자 생존권 보장하라.’ 등이었다.

정문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구호도 바로 그것이었다. 사내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떴다. 비는 여전히 보슬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수막이 벗겨진 창문 밖의 풍경이 한결 선명했다. 정문으로 나가는 길가에 선 활엽수의 연둣빛이 사내의 눈에는 왠지 고통스럽게 보였다. 학생들의 구호 소리 탓일까. 신록처럼 여린 학생들의 구호 소리에 사내의 심사는 복잡해졌다. 공부는 시기가 있는 법인데. 사내에게 다가온 이는 직원이었다.

“과장님, 학생들이 시청 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전경들 저지선을 뚫어부렀는가?”

“아닙니다. 전경들이 교정에 최루탄을 쏘자 체육과생들이 정문에서 돌멩이로 맞서는 동안 다른 학과 학생들이 담을 넘어갔습니다.”

“학생들이 열 받아부렀는갑네.”

“원래는 교내 밖으로 나갈 계획이 없었는데 흥분해서 담을 넘어간 것 같습니다.”

사내는 자전거를 타고 정문 쪽으로 나갔다. 보슬비는 미세한 물방울의 는개로 바뀌어 얼굴에 부딪쳤다. 그때 사내는 코를 감싸 쥐었다. 전투경찰이 페퍼포그차로 쏘아댄 최루탄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학교 담을 뛰어넘어 뒤늦게 시위대열에 합류하는 학생들이 사내를 보더니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담 너머는 개천이 있고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청이 나왔다. 시청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 광주고등학교 앞을 지나 직진하면 금남로였다. 또한 시청에서 직진하면 산수동오거리, 법원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농장다리, 장동, 도청이 나왔다. 사내는 자전거를 타고 학생들을 뒤쫓았다. 가는 중에 낯익은 상업교육과 2학년 이정연 학생에게 조심하라고 일렀다.

“다치지는 마라!”

“걱정 마세요. 도청까지 갔다가 곧 돌아올 겁니다.”

그런데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학생들의 시위에 반응하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제풀에 꺾이겠지.’ 하는 표정으로 구경했다. 빗방울은 다시 굵어졌다. 금남로를 거쳐 도청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학생들 모두가 방목하는 양떼처럼 흠뻑 젖었다. 송기숙, 명노근 등 교수평의회와 교수협의회 교수 2백여 명도 스쿨버스를 이용해 금남로에서 내린 뒤 도청 앞까지 걸어와 학생들과 합류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자 생존권 보장하라.’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는 동안 빗발은 도청 앞 원형 분수대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계속>



[작가 정찬주]

▲ 보성 출신

▲ 동국대 국문과 졸업

▲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 ‘소설 무소유’, ‘이순신의 7년’ 등 다수

▲ 현재 화순 쌍봉사 인근 ‘이불재’에서 집필중





[삽화 이정기]

▲전남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시대의 유물을 마주하다’등 개인전 9회

▲제19회 광주신세계미술제 대상, 제21회 광주미술상 수상 등

▲2017~2018 시립미술관 국제레지던시 입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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