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공동체’에서 ‘아파트 성(城)’으로 이주하는 비극
2019년 07월 26일(금) 04:50 가가
광주는 지금 19곳의 거대한 아파트 공사판이 벌어져 도시 탄생 이후 단시간에 공간 개벽이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광주는 지역과 마을 공동체적 삶의 파괴와 자본의 투기장으로 변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에 민간 공원 개발까지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제품을 찍어 내 3년 이내 4만 여 사각 둥지 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문제는 인류의 보편적 주거가 아닌 한국형 아파트가 되어 공적 공간은 줄고 사적 공간은 넓어진다는 데 있다. 마을과 이웃이 있는 인간 본연의 행복은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의 담은 성벽이 돼 성안에 성을 만들어 신분의 깃발을 달게 한다.
냉전 이데올로기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미국은 마약, 범죄, 테러와 전쟁, 폭동 대책 등의 사회적 ‘보안 강박증’을 전염시켜 주거 형태를 ‘CID’라 불리는 안전과 보안망을 최우선으로 하는 군 병영적 주거 공동체를 전역으로 전파했다. 그러나 미국 CID 거주 형태는 인간의 질적 행복의 삶을 떨어뜨린다고 미국의 지식인들은 반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을 모방한 한국형 아파트는 성(城)이다. 한국형 아파트는 특정 층과 계급만이 출입하는 문을 만들고 자체 내에 그들만이 이용하는 시설을 갖고, 외부를 잠재적 적으로 차단하는 전형적인 닫힌 군의 병영처럼 ‘단지’를 구축했다.
특히 모든 아파트 제품들이 이런 단지를 거듭 모방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 아파트 캐슬(성)은 전쟁의 도구로, 방범 초소, 보안 카메라, 출입구 통제 차단기, 성벽의 담 등을 견고하게 만든다. 도시민의 절반 이상을 마을에서 단지로 옮겨 가두고 있다. 이로써 아파트 단지는 공적 열림을 사적 소유의 지킴으로 만들어 닫힌 주거 공간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교류하고 살아가는 정서의 마을 사회는 없고 안전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나 홀로의 개인 집만 있는 고독자는 늘 땅을 밟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감각의 촉수를 상실하고 말았다.
한국 특유의 문화적 상황을 무시한 획일적 주택 정책은 시민들의 생활 공간 환경에 대한 지역별로 다른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세계의 보편적 주거 문화에 대한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도시들 중 많은 곳에서 인구 감소를 걱정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고밀 개발 정책의 당위성을 주장하려는 태도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이런 획일성 사태는 공동체 마을에서 거주자로서 교류하고 공동 관심사를 구현하는 인간적 삶과 행복이라는 마을과 주택 본연의 가치와 목표를 상실시켰다. 그래서 마을은 사라지고 이웃도 사라진 아파트는 ‘얼굴 없는 이웃이 모인 집합공간’으로 변했다.
더 이상 마을과 이웃, 더 나아가 지역의 이야기는 단절되고, 미디어 속의 가상적 이웃에 대해 모두 같은 이야기만 하는 앵무새가 됐고, 설정된 이웃의 이미지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제 조정 받고 있다.
주거 공간인 아파트가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 듯이 표준·획일화되고 대량 복제돼 생산되고 있다. 이 대량 소비재는 최대의 판매 이익을 위해 초밀화·고층화·집적화를 통해 군사적 성벽처럼 병영의 단지를 만들고 있다. 특히 신분적 상황은 자본의 계급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다의적으로 문화 자산과 사회적 자산 등이 포함된다. 재산이 없다고 그 자체가 신분적 무자격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신분은 아파트를 생산하는 제조사와 면적에 따라 단지화시켜 계급화하고, 이 계급이 곧 신분의 기준을 정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이런 단지의 블록에 의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차별화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비극은 생산 제조사의 브랜드 선택과 평수를 늘리는 것이 삶의 가치와 목표가 됐다. 사라진 마을 안에서는 오직 경제적 자산만이 비대칭적으로 크게 부각시키는 졸부형 자산만이 남게 된다.
아파트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재탄생시키려는 국가나 지자체의 의지가 필요하다. 모든 아파트의 각 라인 입구 1층 양쪽 집을 공적인 휴게 사랑방 형태의 개방된 공간으로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공개된 공간 확보는 보안 감시망이 필요 없게 되고, 방문자를 마중해 접대하고, 주민들의 수다의 장소가 될 수 있어 진정한 마을의 회복을 이룰 수 있다. 이럴 때만이 마을 정신은 살아나고 잃어버린 문화와 사회적 자산이 회복 되며 이웃 이야기, 마을 이야기, 지역 이야기가 소통하는 문화의 장이 될 것이다.
냉전 이데올로기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미국은 마약, 범죄, 테러와 전쟁, 폭동 대책 등의 사회적 ‘보안 강박증’을 전염시켜 주거 형태를 ‘CID’라 불리는 안전과 보안망을 최우선으로 하는 군 병영적 주거 공동체를 전역으로 전파했다. 그러나 미국 CID 거주 형태는 인간의 질적 행복의 삶을 떨어뜨린다고 미국의 지식인들은 반대하고 있다.
사람들이 교류하고 살아가는 정서의 마을 사회는 없고 안전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나 홀로의 개인 집만 있는 고독자는 늘 땅을 밟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감각의 촉수를 상실하고 말았다.
한국 특유의 문화적 상황을 무시한 획일적 주택 정책은 시민들의 생활 공간 환경에 대한 지역별로 다른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세계의 보편적 주거 문화에 대한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도시들 중 많은 곳에서 인구 감소를 걱정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고밀 개발 정책의 당위성을 주장하려는 태도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이런 획일성 사태는 공동체 마을에서 거주자로서 교류하고 공동 관심사를 구현하는 인간적 삶과 행복이라는 마을과 주택 본연의 가치와 목표를 상실시켰다. 그래서 마을은 사라지고 이웃도 사라진 아파트는 ‘얼굴 없는 이웃이 모인 집합공간’으로 변했다.
더 이상 마을과 이웃, 더 나아가 지역의 이야기는 단절되고, 미디어 속의 가상적 이웃에 대해 모두 같은 이야기만 하는 앵무새가 됐고, 설정된 이웃의 이미지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제 조정 받고 있다.
주거 공간인 아파트가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 듯이 표준·획일화되고 대량 복제돼 생산되고 있다. 이 대량 소비재는 최대의 판매 이익을 위해 초밀화·고층화·집적화를 통해 군사적 성벽처럼 병영의 단지를 만들고 있다. 특히 신분적 상황은 자본의 계급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다의적으로 문화 자산과 사회적 자산 등이 포함된다. 재산이 없다고 그 자체가 신분적 무자격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신분은 아파트를 생산하는 제조사와 면적에 따라 단지화시켜 계급화하고, 이 계급이 곧 신분의 기준을 정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이런 단지의 블록에 의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차별화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비극은 생산 제조사의 브랜드 선택과 평수를 늘리는 것이 삶의 가치와 목표가 됐다. 사라진 마을 안에서는 오직 경제적 자산만이 비대칭적으로 크게 부각시키는 졸부형 자산만이 남게 된다.
아파트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재탄생시키려는 국가나 지자체의 의지가 필요하다. 모든 아파트의 각 라인 입구 1층 양쪽 집을 공적인 휴게 사랑방 형태의 개방된 공간으로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공개된 공간 확보는 보안 감시망이 필요 없게 되고, 방문자를 마중해 접대하고, 주민들의 수다의 장소가 될 수 있어 진정한 마을의 회복을 이룰 수 있다. 이럴 때만이 마을 정신은 살아나고 잃어버린 문화와 사회적 자산이 회복 되며 이웃 이야기, 마을 이야기, 지역 이야기가 소통하는 문화의 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