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진실을 찾아서 <4> 5월 18일의 진실

7공수 여단장 전남대 시찰 ‘비극’의 신호탄
“시찰 앞서 학생들 쫓아내라” 공수부대 20여명 투입 무차별 유혈진압 … 순식간에 마무리
5월 31일 계엄사 발표문에 없던 ‘전남대 정문 앞 시위’ 한 달 뒤 국보위 보고서에 첫 등장
“학생들이 가방에 담아 온 돌 던져 공수부대원들 자극” 5·18 왜곡해 대응 논리로 활용
7공수 전투상보 등 기록 조작 국회청문회 제출 … 은폐된 31사단 전투상보서 진실 찾아내
2019년 06월 20일(목) 04:50

1980년 5월 15일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인 학생들이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전투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7공수여단 부대원들은 18일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살인 진압작전’을 벌였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문서 1. 국보위 5·18 조사단 편제표.






문서 2. 군이 은폐한 31사단 5월 18일 상황일지.






문서 2. 군이 은폐한 31사단 5월 18일 상황일지.






문서 3. 31사단 전투상보




문서 5. 필자가 새롭게 발굴한 전교사 상황일지.










사라예보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가 5월 항쟁을 촉발하고,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란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군 기록의 발굴과 검증을 통하여 5월 18일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고자 한다.

◇5월 18일 상황에 대한 신군부의 주장

전두환은 회고록에서‘광주사태’의 발단은 5월 18일 학생들의 시위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미리 가방에 담아 온 돌을 던져 무방비상태였던 공수부대원들을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자극을 받아 과격한 진압을 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 지만원 등 5·18왜곡·폄훼세력이 활용하는 논리중의 하나로 학생들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면서 계엄군의 책임을 희석시킨다.

책가방 속에 돌을 숨겨와 계엄군을 공격하면서 사태가 촉발되었다는 주장은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 공식화되었다. 군은 국회청문회 준비 서면에서 5월 18일의 상황을 “5월 18일 오전 9시 30분경 전남대 정문에서 학교를 경비 중이던 계엄군에게 전남대생 200여명이 도서관 출입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미리 책가방 속에 준비하여 온 돌을 꺼내 계엄군에게 투석전을 전개 충돌하기 시작”이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5·18에 관한 신군부의 최초 발표인 1980년 5월 31일 ‘광주사태’ 발표문에는 전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가 언급되지 않았다. 계엄사령부가 공식 발표한 군과 데모군중의 충돌 진상에는 학생들이 광주시내 중심가로 불법 진출한 것으로 언급했다. 5·18민주화운동 강제 진압 직후 발표한 계엄사령부의 공식 발표문에서 거론되지 않았던 학생들의 투석관련 내용은 1980년 6월 활동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의 ‘광주사태’ 보고서에 표와 같이 처음 거론된다.

국보위 5·18조사단은 이광로 육군 소장을 조사단장으로 문서 1과 같이 범정부차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사단은 1980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광주, 목포 등 18개 시군과 작전 참가부대에 대한 현장조사를 통해 사태의 원인과 문제점, 대책 등이 포함된‘광주사태’보고서를 작성했다. 국보위의 보고서는 신군부차원의 공식 조사 결과로서 이후 5·18대응 논리의 토대가 되었다. 학생들의 투석, 유언비어에 현혹된 시민들의 가세, 혈기왕성한 젊은 군인들의 일부 감정적 대응이라는 왜곡의 논리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1980년 국보위 보고서에 거론된 대학생들의 투석은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의‘광주사태’보고서에서 책가방에 돌을 미리 준비한 것으로 탈바꿈한다. 안기부의 보고서 내용은 1988년 국회청문회 대응 논리와 대부분 일치한다. 1980년 5월 18일의 상황은 표에서 확인되듯이 작성 시기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기술되었다.

◇은폐된 군 기록과 특검조사에서 확인된 새로운 사실

전두환과 신군부는 5월 18일의 상황을 정치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표했다.

그러나 5월 18일의 진실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군 기록과 특검 조사에 따르면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 최초 충돌은 계엄군의 일방적 진압이었다. 일방적 진압은 그간 갈고 닦은 충정훈련 결과와 진압교본에 따른 것이었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7공수 여단장의 전남대학교 시찰 때문이었다. 1996년 1월 특검조사 과정에서 당시 진압을 지시했던 대대장은 여단장의 시찰에 앞서 정문 앞에 있는 학생들을 빨리 쫓아내고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해산을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정문 앞에 있는 학생들을 빨리 쫓아내라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공수부대원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학생들을 진압했다. 실제 진압도 순식간에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종료된 직후 전남대학교에 도착한 7공수여단장은 별다른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군 기록에서도 이러한 내용은 확인이 가능하다. 신군부가 은폐한 31사단 작전상황일지에 따르면 “10:30 전대 정문 앞에 약 100명 가량의 학생이 집결 중(공수 조치: 즉각 출동 교문 봉쇄 및 진압임무 수행 분산 해체), 11:00 현재 학생집결 없음(전남대)”이라고 당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1988년 국회 청문회 당시 군은 31사단 작전상황일지는 관리부실로 인하여 작성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2017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조사결과 31사단작전상황일지는 기무사에서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군이 은폐한 31사단 작전상황일지에는 5월 18일, 그날의 진실이 담겨있다.

1988년 군이 국회청문회에 제출한 31사단 전투상보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31사단 전투상보의 내용이 워낙 부실하여 청문회 당시 조작의혹까지 제기되었지만 군은 규정에 따라 제대로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보위 조사단의 활동에서 확인되듯이 5·18이후 군은 일선 부대의 작전과 기록을 대상으로 수차례의 검열을 실시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작성한 군 기록이 부실하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내용을 감췄거나 작성 이후에 조작·은폐가 이뤄졌다는 반증이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지와 7공수여단 전투상보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지는 5월 18일 최초 시위 시간을 9시 30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군이 주장한 5월 18일 상황과 가장 부합되는 군 기록이다. 문서 4는 1988년 국회청문회에 군이 제출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이다. 문서 5는 1980년 당시 군사법원 재판기록에 편철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로 필자가 새롭게 확인한 것이다. 두 개의 문서는 같은 전교사 작전상황일지이지만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목은 물론 일부 내용에 있어서도 상이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위·변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7공수여단 전투상보는 “5월 18일 오전 10시 20분 100여명의 시위학생-2개 중대 투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투입된 병력은 2개 중대가 아니라 2개 지대 20명이었다. 전대 정문 앞 시위 진압을 위하여 2개 지대를 투입했다는 사실은 7공수여단 33대대장의 특검 진술과 7공수여단의 내부 자료에서 확인된다. 2개 지대를 투입해서 간단히 해산시킨 시위를 군의 공식 기록인 7공수여단 전투상보에서는 무려 2개 중대(74명)를 투입한 작전으로 조작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조작은 5월 18일 학생들의 시위가 과격했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학생들의 시위가 과격했고, 경찰력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공수부대원을 투입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을 보증하기 위하여 군 기록을 조작, 은폐한 것이다.

전두환의 주장과 달리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잔혹한 폭력에 노출된 것은 학생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압을 당한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했지만 시내에서 마주한 상황 또한 전남대학교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민들의 분노는 유포된 악성 유언비어 때문이 아니라 시민들이 목격하고 체험한 공수부대원의 잔혹한 폭력 때문이었다. 5월 18일의 항쟁은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진압에 맞선 시민들의 정의로운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hesal@hanmail.net



※다음 원고는 7월 25일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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