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새말 새몸짓] <2>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높이에서 새로 살자
민주화 상태 넘어 선진국 높이로 올라서는 도전을
2019년 05월 14일(화) 00:00

송필용 작 ‘무제’

멈춰야 하는가, 달려야 하는가. 버려야 하는가, 가져야 하는가.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그만 내려놓아야 하는가. 쉼 없이 근면해야 하는가, 이제 그만 소위 힐링을 구해야 하는가. 지지부진한 삶 속에서도 이런 질문들은 종횡무진 파고든다. 이 질문다발은 결국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합쳐진다.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구는 이렇게 해야 옳다 하고, 다른 누구는 또 저렇게 하라고 한다. 이렇게 살라는 사람이나 저렇게 살라는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아 보이니 선택은 더욱 어렵다. 모두 틀리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맞아서라기보다 필시 자기만의 각성이 이뤄지지 않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뭘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무명’(無明)에 빠져있으면 돌고 도는 윤회의 틀을 못 벗어나는 것과 같다. 당연히 삶의 무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말하기 전에 어디서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 연극배우도 연기를 잘하려면 자기가 서는 무대의 정체에 밝아야 한다.

인간이 사는 무대는 두 덩어리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이 만든 덩어리, 다른 하나는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이 만든 것 아니면, 안 만든 것이다.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는 인간과 별 관계없이 자기가 가진 원칙에 따라 자기 알아서 스스로 돌아간다. 자기 알아서 스스로 돌아가는 것을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다른 한 덩어리는 인간이 만들었다. ‘문명’(文明)이다. ‘문명’(文明)이라 할 때의 ‘문’(文)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다 인간의 손이 닿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다. 문자(文字)는 인간이 ‘만든’ 기호이고, 문학(文學)은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 관한 지적 활동이다. ‘문명’은 ‘문화’(文化)라고 하는 인간의 독특한 활동이 만든 결과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하거나 만들어서’(文) 변화를 야기(化)한다. 이런 의미로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가장 근본적인 사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만년필을 만들었다 치자. 만년필이 없던 세상과 만년필이 새로 등장한 세상은 다르다. 어찌 되었건 이제 세상은 만년필이 있는 세상과 없던 세상으로 갈라진다. 달라진 것을 변화라고 한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이 세상에 변화를 야기한 격이다. 변화를 야기함으로써 인류의 삶은 더 넓어지고 편리해진다. 인류에게 하는 중요한 공헌이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인간 삶에 변화를 야기하였고, 만년필을 만들지 않고 사용만 하는 사람은 야기된 변화의 결과를 그저 수용했다. 물론 만년필을 수용하여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다른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다. 이것도 문화적 활동이다.

인간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다. 즉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다. 이 정의가 내려지는 순간, 인간은 두 층으로 격이 나뉜다. 누군가는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인다.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유롭다’, ‘주체적이다’, ‘독립적이다’고 표현하고,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종속적이다’고 칭한다. 인간이 근본적인 의미를 잃지 않고 활동하면, ‘자유롭다-독립적이다-주체적이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문화적인 높이로 산다는 뜻이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고, 누군가 만든 만년필을 수용하기만 하면 종속적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하는 활동이 창의적 활동임은 매우 자명하다. 그래서 ‘자유-독립-주체-창의’는 같은 차원에서 하나로 모여질 수밖에 없다.

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낮은 층을 이루는 것이 물건들이다. 물건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로서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대포, 컴퓨터, 군함, 연필 등등이다. 물건은 물건 자체의 역량으로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길과 돌아다니는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 물건이 나오고 돌아다니는 길을 제도라고 한다. 도시, 농촌, 민주제, 공화제, 사회조직 등등이다. 이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물건이 등장하도록 보장한다.

그런데 제도는 또 좋은 세계관이나 생각의 방식, 즉 철학에서 비롯된다. 철학은 추상적이다. 좋은 철학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구체적인 일상의 삶은 좋은 물건으로 보장되고, 구체적인 좋은 물건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좋은 제도가 만들며, 좋은 물건들과 좋은 제도는 추상적인 좋은 철학이 책임진다. 한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물건’에만 가 있으면 후진국, 물건과 제도에 가 있으면 중진국, 물건과 제도와 철학에 모두 가 있으면 선진국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선진국이라 불러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단계에 와 있지만, 아직은 중진국이다. 우리 사회의 격렬한 논쟁들은 여전히 제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공수처를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 내각제로 바꿔야 하나 아니면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해야 하는가, 대학입시에서 수능을 몇 퍼센트로 하고 자사고를 폐지하느냐 유지하느냐, 선거제를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재벌을 개혁해야한다 말아야 한다 등등 수준 높은 거의 모두가 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의식도 매우 제도 의존적이다. 자녀들을 교육 시키고 싶은 방향은 이런데, 교육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나 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는데 내 삶이 사회구조 때문에 이리 되었다고 하는 한탄들도 결국은 모두 제도에 깊이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은 자신과 사회를 독립적으로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가 당연히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교육은 입시 제도에 함몰되어 있다. 고등학교라는 제도에서 대학이라는 제도로 이동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대학이나 고등학교라는 제도를 이용해서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나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옆으로 밀쳐져 있다. 교육 현장의 황폐화는 교육의 정신과 철학이 사라지고, 제도를 지키려는 종속적 습관에서 비롯된다.

우리 사유의 높이는 제도까지는 도달했으나 문화나 철학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중진국 상위 단계까지는 왔으나 선진국으로 진입은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종속적 단계로는 가장 높지만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모든 말들을 다 묶으면 결국 우리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다는 말로 귀결된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 사는가. 자유롭고 독립적인가. 아직 아니다. 우리 삶을 채우며 편리와 풍요를 제공하는 거의 모든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한글’이 거의 유일하다. 우리는 제조업 강국이라 물건을 잘 만들고 또 수출해서 먹고 산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어 수출까지 하는 물건이라 해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따라 만들었을 뿐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제도를 우리가 만들어서 쓰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우리 삶의 구체적 구성물인 물건과 제도 모두 외부에서 들여왔다. 독립적이기 보다는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의 번영과 발전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새로운 도전은 매우 분명하다.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다. 정치적이고 감성적인 독립이 아니라 삶의 독립, 생각의 독립,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높이의 독립이다.

인간을 규정하는 말들은 적지 않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호모 이코노미쿠스 등등.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드는 일을 기준으로 한 분류들이다. 이런 모든 분류를 하나로 통합하여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도전에 나서지 않는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 문명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것이며, 이런 문명을 쌓는 인간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공과 조작을 거부하고, 그냥 아무렇게 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을 자연이라고 하면서 높은 차원의 것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있는데, 이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패배적인 자세일 뿐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사명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적’이라는 말은 인위와 조작적 활동의 결과를 원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지, 인위와 조작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있던 곳에서 없던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변화를 야기한다. 아직 인식되지 않은 곳, 아직 경험된 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의미에 닿아있는 인간이라면 머무르지 않는다. 혁명의 깃발을 완장으로 바꾸지 않는다. ‘지속 부정’과 ‘새 말 새 몸짓’으로 무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새 말 새 몸짓’은 무엇인가. 제도의 높이에서 멈춘 상태를 넘어서서 삶의 태도와 관점의 혁신을 감행해야 한다. 철학과 과학과 문화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다.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 선진국 높이로 올라서는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바로 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단계로 상승하는 일이다.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신화는 물건과 제도의 높이에서 이룬 발전이다. 후진국과 중진국 정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이런 성공 신화를 뒤로 물리치고 한 단계 더 높고 새로운 신화를 써야 한다. 산업화 세력이 건국 세력을 도태시키고 새로워졌듯이, 민주화 세력이 산업화 세력을 밀어내며 나라를 새롭게 했듯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새 말 새 몸짓’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력이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키는 도전이다. 민주화 단계까지 올라서면서 하던 얘기와 주장을 아직도 계속하면서 그것을 지키려고만 하고 있다면, 당신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권력과 재력으로는 어쩔지 모르지만, 인간으로는 미성숙 상태에 있다. 깃발을 완장으로 바꿔 차고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사소한 사람일 뿐이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다음 원고는 6월4일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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