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심선언
2019년 03월 05일(화) 00:00

[김정남 언론인]

1973년 10월 16일 오후 1시 45분, 나와 형은 아스토리아 호텔 지하 다방에서 만나 차를 한잔 마시고 웃으며 걸어서 남산청사(중앙정보부) 정문에 도착했다. 나는 담당과에 전화를 걸어 형님께서 오셨음을 알렸다. 담당과의 직원이 나와서 형님을 안내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형님이 그를 따라 들어가기 전 나는 ‘그들을 믿어도 좋을까’ 하는 불안을 감추고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 이때 한번 봐 두십시오”하며 웃었더니, 형도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와 보게 되었구나” 하면서 같이 웃으시더니…. 이것이 나와 형의, 우리 형제의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여기서 형은 당시 서울 법대에서 민법을 가르치던 최종길 교수이다. 최종길 교수는 서울 법대에서 도서관장과 학생과장 등의 보직을 맡으면서 시위하다 끌려가거나 농성하는 제자들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다정다감한 스승이었고, 교수회의에서는 “학생들의 행동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역설했으며,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경찰의 폭력 진압과 연행 사태에 대해서는 “우리는 결코 스승으로서 모른 체할 수 없다. 총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생인 최종선은 1972년에 중앙정보부 정규 과정 제9기에 수석으로 합격, 73년 당시에는 최고의 보직이라 할 수 있는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앞의 글은 동생인 최종선이 형님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는 중앙정보부 5국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진 출두 형식으로 형을 안내하는 장면을 최종선이 묘사한 것이다. 최종선은 출퇴근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출입자 통제소에 들러 형이 귀가했는지를 확인했지만, 그때마다 형의 주민등록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0월 19일 새벽 5시경, 중앙정보부 당직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오전 7시까지 당직실에 와 대기하라는 연락을 받고 최종선은 ‘올 것이 온 것’을 직감했다. 감찰과장 이병정은 최종선의 시선을 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최 교수께서 오늘 새벽 1시 30분, 자신의 간첩 행위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7층에서 투신자살하여 돌아가셨어.”

1973년 10월 25일, 김치열 중앙정보부 차장은 유럽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간첩단 54명을 적발, 이 중 3명을 구속 송치하고 17명을 불구속 송치했으며, 이들 중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는 중앙정보부에서 구속 수사를 받던 중 간첩임을 자백하고 범행 사실을 털어놓은 후, 변소 창문으로 투신자살했으며 최 교수와 최근의 학원 사태와는 관련이 없다.”

이것이 박정희 유신 시대 의문사 1호 사건인 최종길 교수의 죽음 전말이다. 의사인 부인조차 시신을 보지 못했고, 장례에는 그 누구도 참석지 못하게 한 채 간첩이란 누명까지 쓰고 최종길 교수는 모란공원 묘지에 묻혔다.

2002년 5월,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최종길 교수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했다”고 인정하면서,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가 허위로 날조된 것이었음을 밝혔다. 자살이 아니라 고문치사 된 것이요, 간첩이 아니라는 누명을 벗고 그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은 당당한 법학 교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동생 최종선의 ‘수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수기는 1974년 1월, 응암동 천주교회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어, 장독대와 수녀원 등을 거치면서도 용케 일실(逸失)을 면했다.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23일 “소위 유신 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민주화 투쟁의 한 방편으로 양심선언 운동을 제창하기 이전에 쓰였지만, 최종선의 수기를 나는 양심선언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73년 10월 26일에서 11월 11일 사이에 쓴 그 양심선언의 시작과 끝은 이렇다.

“1973.10.26. 세브란스병원 정신병동.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후일을 위해 형님의 죽음에 대한 오늘의 한을 생생히 남겨 두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형님에게 반역자(간첩)의 누명을 씌워 대대적으로 보도한 어제저녁, 쇼크를 가장하여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감시 범위 속에 남아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내가 뜻하는 글을 제한받지 않고 쓸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준, 희정(최종길 교수의 유자녀)! … 최 교수의 자식답게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당당히 살아가거라.”

그 최종선이 미국에서 살다가 며칠 전 서울에 다니러 왔다. 나는 그의 양심선언을 1988년 10월,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한 인연이 있다. 그는 이 양심선언을 보완한 ‘산자여, 말하라’(2001, 공동선)는 책도 썼는데, 그는 이 책을 국민께 드리는 보고서, 제2의 양심선언이자 고해 성사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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