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의 아름다운 뒷모습 -연촌 최덕지가 은퇴하던 날
2019년 01월 14일(월) 00:00 가가
어쩌다 유행가를 흥얼거리다 보면 뜻하지 않게 노랫말 어느 한 대목에서 ‘그게 진리로구나’ 감탄을 연발할 때가 많다.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기심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물방아 도는 내력’이라는 노래의 가사 한 절이다. 세상에 좋은 것이 벼슬이고, 그 이상 좋은 것은 명예인데, 왜 그것이 싫어서 초가삼간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연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조선 왕조 초기 세종이 승하하고 이어 보위에 오른(1451년) 세종의 아들 문종이, 전라도 영암의 영보촌에 숨어 살면서 학문만 연구하던 관인이자 학자였던 연촌 최덕지(崔德之, 1384∼1455)에게 예문관 직제학이라는 참으로 명예로운 벼슬을 내려 조정으로 나오게 했다. 최덕지는 내키지 않았으나 새로 등극한 임금의 부름에 예의상 응하지 않을 수 없어 상경한 뒤 직책을 맡았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남원 부사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버린 옛 신하를 불렀음은, 그만큼 그의 덕망이 높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마뜩잖게 여겼던 대로 오래 벼슬할 세상은 아니었다. 문종은 병약한 몸이었고 그 아들 단종은 아직 어렸는데, 문종의 아우 수양대군 즉 뒷날의 세조가 국정을 좌지우지하여 징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에 최덕지는 결단을 내린다. 벼슬도 좋고 명예도 좋지만, 나는 기심 매는 시골로 돌아가겠다면서 치사(致仕)의 상소를 올리고,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고 만다. 벼슬에서 물러날 연령이 아닌데도 이른바 명예퇴직으로 서울을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 어진 선비 관인이 벼슬을 그만둔다니, 아쉽지만 그의 훌륭한 의리에 감탄하여 당시 조정에 벼슬하던 모든 이들이 떠나는 최덕지를 한강까지 따라 나왔다. 모두가 송별의 시를 지어 그의 아름다운 떠남을 극구 칭송해 주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좋은 벼슬, 그렇게 높은 명예를 헌신짝처럼 던지고 홀연히 서울을 떠나는 최덕지의 뒷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다행인 것은 이때의 역사적 기록이 제대로 남아 그 아름다운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 왕조 500년의 대표적 의인이던 박팽년·성삼문 등 뒷날의 사육신들이 모두 선생으로 모셨던 그의 떠남에 칭송과 아쉬움을 간절한 시문으로 나타냈다. 또한 정인지·신숙주·이석형 등 당대의 명인들 모두가 이에 동참했으니, 40명이 넘는 동료·후배들이 시로써 글로써 그의 낙향을 한없이 아쉬워하고 부럽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성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에 온전했으니, 그 님은 우리들의 스승이로다”(終始能全義 如公我所師)라고 스승의 떠남을 아쉬워했다.박팽년은 40여 명의 시문을 묶은 책을 만든 뒤 그에 대한 발문(跋文)을 지었으니 그의 찬사 내용이 너무나 훌륭했다.
박팽년은 참으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는 ‘최직제학귀전시권발’(崔直提學歸田詩卷跋)이라는 글에서 “최 선생께서 상소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하자 사림들이 서로 칭찬해 마지않으며, 아는 사이나 모르는 사이에 관계없이 흠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했다. 벼슬과 명예를 가볍게 여긴 최덕지의 높은 뜻을 그대로 표현한 것인데,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어려운 일을 쉽게 결단하고 의리에 합당한 일을 한다면 모두가 우러러보며 흠모해 마지않을 것이다.
연촌(烟村)으로 부르던 호를 존양(存養)이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온 최덕지는 존양재(存養齋)라는 서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세기에야 꽃피우던 호남의 유학은 이미 15세기의 최덕지에서 그 뿌리가 심어졌음을 알게 된다. 뒷날 전라 감사로 영보촌을 방문했던 저헌 이석형(李石亨)은 ‘제최직제학존양정’(題崔直提學存養亭)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마음 보존하여 나의 성품 기르도다.(存吾心兮養吾性) 세상의 명예 구하지 않고 천명(天命)을 즐기노라.(無求於世兮 樂夫天命)” 최덕지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는 성리학 공부와 학문의 깊이를 한없이 찬양한 것이다.
호남에서 조선 초기의 대표적 성리학자는 최덕지였다. 그는 선비의 의리를 실천하고 지킨 참선비였다. 그럼에도 호남에 학문의 뿌리를 심은 그분을 우리는 모두 잊고 지내고 있다. 이제는 그의 학문과 의리를 밝혀서 현양해야 할 때가 아닌가.
다행인 것은 이때의 역사적 기록이 제대로 남아 그 아름다운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 왕조 500년의 대표적 의인이던 박팽년·성삼문 등 뒷날의 사육신들이 모두 선생으로 모셨던 그의 떠남에 칭송과 아쉬움을 간절한 시문으로 나타냈다. 또한 정인지·신숙주·이석형 등 당대의 명인들 모두가 이에 동참했으니, 40명이 넘는 동료·후배들이 시로써 글로써 그의 낙향을 한없이 아쉬워하고 부럽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성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에 온전했으니, 그 님은 우리들의 스승이로다”(終始能全義 如公我所師)라고 스승의 떠남을 아쉬워했다.박팽년은 40여 명의 시문을 묶은 책을 만든 뒤 그에 대한 발문(跋文)을 지었으니 그의 찬사 내용이 너무나 훌륭했다.
박팽년은 참으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는 ‘최직제학귀전시권발’(崔直提學歸田詩卷跋)이라는 글에서 “최 선생께서 상소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하자 사림들이 서로 칭찬해 마지않으며, 아는 사이나 모르는 사이에 관계없이 흠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했다. 벼슬과 명예를 가볍게 여긴 최덕지의 높은 뜻을 그대로 표현한 것인데,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어려운 일을 쉽게 결단하고 의리에 합당한 일을 한다면 모두가 우러러보며 흠모해 마지않을 것이다.
연촌(烟村)으로 부르던 호를 존양(存養)이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온 최덕지는 존양재(存養齋)라는 서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세기에야 꽃피우던 호남의 유학은 이미 15세기의 최덕지에서 그 뿌리가 심어졌음을 알게 된다. 뒷날 전라 감사로 영보촌을 방문했던 저헌 이석형(李石亨)은 ‘제최직제학존양정’(題崔直提學存養亭)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마음 보존하여 나의 성품 기르도다.(存吾心兮養吾性) 세상의 명예 구하지 않고 천명(天命)을 즐기노라.(無求於世兮 樂夫天命)” 최덕지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는 성리학 공부와 학문의 깊이를 한없이 찬양한 것이다.
호남에서 조선 초기의 대표적 성리학자는 최덕지였다. 그는 선비의 의리를 실천하고 지킨 참선비였다. 그럼에도 호남에 학문의 뿌리를 심은 그분을 우리는 모두 잊고 지내고 있다. 이제는 그의 학문과 의리를 밝혀서 현양해야 할 때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