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유럽 예술기행]<10> 오스트리아-빈Ⅱ
2018년 12월 11일(화) 00:00
박물관의 도시, 빈의 예술거리를 소요하다
한국서 더 인기있는 슈베르트
생각보다 초라했던 박물관
클림트가 그린 초상화 사라지고
‘우상’ 베토벤 옆에 묻혀있네
벨베데레 궁전·레오폴드 박물관
클림트·실레 사후 100년전 개최

수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별궁 벨베데레.

베토벤이 폐렴에 걸려 운명했던 건물로 현재는 베토벤박물관.








오스트리아에 온 지 며칠. 이제 숙소 부근이 눈에 익어 산책을 다닌다. 도심까지 나가 노상카페에서 카푸치노를 즐기는 것도 일과가 된 듯하다. 아내와 자주 가는 곳은 숙소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빈 문리과대학이다. ‘ㅁ’자 공원형 대학건물인데 시민들에게 24시간 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학교 안에 아이들 놀이터가 있고 마트와 카페, 서점도 있다. 숲속에는 벤치들이 놓여 있어 앉아서 쉬곤 한다. 학교를 가로질러 가면 놀랍게도 한식식당인 ‘이가(李家)네’가 있어 하루 한 끼는 대구탕이나 된장찌개를 먹는다. 음악공부를 위해 빈에 유학 온 학생이 1000여 명 정도라니 한식식당이 한두 군데 있을 법하다.

숙소 인근에는 악성(樂聖) 베토벤(1770~1827)이 운명했던 건물이 있다. 그 건물은 베토벤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어제 베토벤이 평소 시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고는 그가 더 가깝게 다가온다. 베토벤이 ‘훌륭한 시는 그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베토벤 음악이 왜 시적인지 의문도 풀렸다. 그의 ‘전원 교향곡’ 테이프를 서울의 한 자취방에 틀어박혀 반복해서 들었던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베토벤은 크렘스 전원마을 그나이센도르프(Gneixendorf)에서 살던 동생 요한 집을 죽기 몇 달 전에 조카 칼을 데리고 가 살았는데 그때 ‘전원 교향곡’처럼 부드러운 현악 4중주를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나이센도르프에서 빈을 가려면 농부의 우유배달 마차를 이용해야 했고, 그해 겨울 칼과 함께 빈으로 가면서 감기에 걸렸다가 다음해 폐렴으로 악화돼 죽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요한 집도 현재는 ‘베토벤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는데 내가 찾아갔을 때는 문이 닫혀 있어 직계 후손이라는 분과 전화통화만 하고 말았다.

빈처럼 박물관이 많은 도시도 드물 것이다.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운명한 슈베르트박물관이 있다. 오늘은 슈베르트박물관부터 들러 하루를 보낼 생각이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음악을 좋아하는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는 슈베르트를 5세 때부터 악기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11세에 궁정신학원에 입학해 모차르트 서곡이나 베토벤의 교향곡을 접하면서 그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13세 때 변성으로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17세에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인 미사곡을 작곡하고, 18세에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21세에 ‘죽음과 소녀’, ‘송어’ 26세에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 27세에 ‘아베마리아’ 그리고 30세에 ‘겨울 여행’을 작곡하고 1년 후 그의 인생도 지병의 악화로 겨울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베토벤을 단 한 번 만났는데 그것도 베토벤이 운명하기 1주일 전이었다고. 슈베르트 집과 베토벤의 집 사이의 거리는 불과 2㎞.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거리이다. 슈베르트박물관은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하다. 관람객은 아내와 나뿐. 학예사가 우리를 감시하듯 동선을 따라다닌다. 2층 박물관에 단 두 사람뿐이니 경계할 법도 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사람들보다 일본과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작곡가라고 한다. 실제로 한국인이라면 그의 곡인 ‘들장미’나 ‘아베마리아’ 등을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한번쯤 다 들어보았을 것이다.

박물관에는 슈베르트가 사용했던 피아노, 안경, 악보 등이 전시돼 있다. 클림트가 그린 슈베르트 초상화는 없다. 다만, 누구의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벽에 걸린 슈베르트 초상화를 보니 영원한 청년 같다. 죽어서는 그의 아버지 뜻에 따라 빈 중앙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안장됐다고 하니 요절한 그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렸을 것 같다.

슈베르트가 살았던 생가. 현재는 슈베르트박물관.




슈베르트가 살았던 생가. 현재는 슈베르트박물관.






숙소로 돌아와 빈의 관광지도를 펴놓고 실레와 클림트 사후 100주년 전시회를 하는 레오폴드박물관과 벨베데레 궁전이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 엊그제 보았던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광장에서 모두 가까운 곳에 있다. 비가 와서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앞뒤로 있는 미술사박물관이나 자연사박물관을 보지 못했는데 시간을 내어 가보고 싶다.

레오폴드박물관은 숙소에서 걸어 갈 수 있는 거리다. 엊그제 보았던 부르크 시어터나 시청청사 등을 지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레오폴드박물관은 거리에서 바로 보이지 않고 또 다른 박물관 뒤에 있다. 크바르티어 뮤지엄(MQ) 아치문을 통과하니 레오폴드박물관이 보인다.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빈과 헝가리 중간에 있는 도시 비움가르텐 출생. 금세공인 아버지와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미술활동 기간은 18년으로 아주 짧지만 빈의 미술계를 지배했고 특히 실레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빈 국립장식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주로 건물의 벽화를 그렸으나 왕립 미술아카데미를 탈퇴한 이후에는 빈의 표현주의 미술을 주도한다. 평론가들로부터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았고, 젊은이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작품 앞에 스크린을 친 채 전시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더욱 유명해진다. 그의 그림소재는 주로 여성의 몸이었고, 주제는 솔직한 에로티시즘이었다. 당시로는 충격적이었을 터. 그는 그림 속의 여인들과 사귀었을 뿐 평생 독신인 채 56세로 눈을 감는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클림트와 실레. 어딘지 닮은꼴 같으면서도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전혀 다르다. 청출어람이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클림트의 그림도 실레처럼 부드럽고 사실적인 초기와 자기내면을 표출시킨 후기가 아주 딴판이다. 클림트는 죽기 8년 전부터 반추상화로 바뀌면서 색조가 어두워진다. 그러나 실레의 어두운 색조와는 차이가 난다. 클림트의 색조에는 화려함이 숨어 있고 무언가 갈구하는 듯 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레의 색조에는 어두움이 음습하게 묻어 있고 대상과 단절돼 있는 듯하다. 두 화가의 삶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그림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르지 않나 싶다. 실레는 어둠 속에서, 클림트는 밝음 속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꽃피웠던 화가였던 듯하다. 특히 실레와 클림트의 모자(母子) 그림을 보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느껴진다. 박물관에서도 두 사람의 모자 그림을 비교하면서 감상하라는 듯 같은 공간에 전시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두 화가를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사랑하듯 모두 국민화가로 아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한 듯하다. 똑같은 시기에 벨베데레 궁전에서도 실레와 클림트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이었던 벨베데레까지는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승차한 택시가 한국산이다. 기사는 한국산 자동차가 값싸고 애프터서비스가 좋다며 자랑한다.

클림트와 실레 그림은 별궁 본관보다는 별관에 더 많이 전시돼 있다. 아마도 왕가에서 소장해 오던 그림들을 내놓은 것 같다. 레오폴드박물관보다 전시된 그림의 양이 적고, 전시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정원이 왕궁답게 잘 관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일 뿐이다.

클림트와 실레 사후 100주년 전시회를 열고 있는 레오폴드박물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또 한군데 들른 곳은 프로이드박물관. 숙소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으므로 서둘러 갈 필요는 없다. 그는 오스트리아 프라이베르크에서 태어났지만 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빈과 인연을 맺는다. 프로이드가 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까닭은 다윈주의자인 카를 클라우스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였다. 다원의 ‘종의 기원’과 괴테의 ‘자연’이란 책을 읽고 감동했던 것이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적 임상치료를 창안한 정신과 의사로서 성욕을 인간생활에서 주요한 동기부여의 에너지로 정의하였으며, 꿈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해석해 냈는데 이때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년 11월에 라이프치히와 빈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이란 책을 펴낸다. 이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유대인 프로이드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1년 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 개관’이란 미완성 원고를 남겨두고 세상과 작별한다.

프로이드박물관에 도착해서 벨을 누르자 안에서 문을 열어준다. 박물관은 2층에 있는데 입구에 기념품 숍이 있고, 방에는 프로이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어머니와 찍은 16세 때의 프로이드 사진이 인상적이고 마가렛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사진도 있는데 클림트는 1905년 그녀의 결혼식 전에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철강업 부호이자 클림트의 후원자였던 그녀의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이 딸의 초상화를 의뢰했기 때문. 이후 마가렛 스톤보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교도소 심리치료 고문으로 있으면서 프로이드와 2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오늘 저녁도 한식식당 이가네로 갈 생각이다. 여주인은 매일 봐서인지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빌려주기도 한다. 내 소설책을 읽은 적이 있다고 하는 여주인이다. /글·사진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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