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과거사 정리로 본 5·18의 과제] <9> 스페인 ‘망각과 기억’
내전 재발 우려 ‘망각 협정’ … 진상규명 없는 과거사 청산 한계
2018년 10월 23일(화) 00:00

내전에서 승리한 1936년부터 197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스페인 독재정권을 펼친 프란시스코 프랑코(오른쪽) 전 총리. 프랑코 사후 스페인 정부는 망각협정을 통해 이념 대립을 막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며 과거사 청산 작업이 다시 진행 중이다.

그동안 망각 방침을 취한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 방법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에서야 스페인은 ‘유럽의 마지막 파시스트’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전 총리의 흔적 지우기를 놓고 찬반 양론이 갈리고 있다. 스페인 전역에 놓여 있던 프랑코 동상을 철거한 데 이어 지난 9월에는 프랑코의 주검을 마드리드 인근 ‘전몰자 계곡’에서 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스페인 의회는 스페인 내전의 주역인 프랑크 전 총리의 주검이 내전 희생자들과 함께 묻혀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입장에서 이장을 추진했었다.

6월에 출범한 진보 성향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사회당 내각은 프랑코의 주검을 ‘전몰자 계곡’에서 발굴하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달 13일 진행한 찬반 투표에서 찬성 176표, 반대 2표, 기권 165표로 통과됐다. 사회당(PSOE) 등 좌파 정당들이 찬성표를 던지며 가결을 주도했지만 반대 의사를 표시하며 투표 자체를 거부한 우파 정당의 표가 48.1%에 달할 만큼 논쟁이 됐다.

프랑코 전 총리의 후손들 또한 즉시 반발하고 나섰다. 사망한 지 40년이 지난 현재 이장을 추진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를 또다시 헤집는다는 명목이었다.

스페인 정부는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 올 연말까지 이장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지만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철권 통치자 프랑코=1892년 12월 4일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랑코 전 총리는 육군 보병사관학교에 입학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스페인과 모로코가 벌인 리프 전쟁에 참전하며 전쟁영웅으로 부상했고 34살의 나이에 스페인 최연소 장성이 된다. 당시 미국과 벌인 미서전쟁으로 식민지 대부분을 잃은 스페인은 모로코에 사활을 걸었고 모로코 파견군을 장악한 프랑코는 자연스레 입지가 커진 것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페인 왕가의 알폰소 13세는 경제 불황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해외로 망명하며 제2공화정이 수립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좌우 대립은 결국 4년 후인 1936년 7월18일 프랑코 등 우파 ‘국민 진영’(Bando Nacional)이 반란을 일으키며 내전을 불러왔고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하며 반군의 승리로 끝났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코는 표면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경제사정을 핑계로 전면적인 참전은 하지 않았고 2차세계이 끝날 때 쯤에는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며 연합군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집권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독재정권을 펼친다. 1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을 제외하고라도 이 기간 프랑코 정권에 의한 희생자만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군인 시절과는 다르게 주먹구구식 행정을 보이며 스페인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졌다. 또 철저한 반공주의, 중앙집권주의를 유지하며 반대파를 숙청했다. 카탈루냐, 바스크 등 정권에 저항하는 지역에 대한 탄압도 심했다. 현재의 북한처럼 스페인 국민들의 해외 탈출을 법적으로 막았고 발각되면 엄벌에 처했다.

그의 탄압은 학계와 예술계도 피해가지 못했다. 당시 스페인 대표 시인집단인 ‘27세대’라 불렸던 미겔 에르난데즈,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감옥에 갇혀 생을 마쳤고 페드로 살리나스, 후안 라몬 히메네즈는 망명한 후 귀국하지 못했다. 이때 스페인을 떠나 중남미 등으로 도망쳤던 시인, 극작가, 학자 등은 망명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지난 2014년 스페인 마드리드 인근에서 발굴된 내전 희생자들. 스페인 내전으로 최대 10만명이 암매장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망각협정=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스페인이 취한 태도는 망각이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거대한 규모 앞에서 스페인의 좌파와 우파는 1977년 ‘국민들의 완전한 형제적 공존’을 이유로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한 이른바 ‘망각협정’(Pacto de Olvido)을 체결한다.

당시 스페인 국민들의 생활수준과 지식수준이 높아지며 대학생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프랑코가 사망했더라도 그의 세력은 여전히 국가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충돌이 우려되고 있었다. 프랑코 정권의 후신인 국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기존 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이행하되 프랑코 세력에 대한 사법적, 정치적 처벌을 묻지 않는 망각협정에 합의한 것이다.

대다수의 스페인 국민이 동의한 배경에는 내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내전이 재발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내전 때 겪었던 고통이 망각 협정을 묵인하게 만들었다. 피해자측에서는 단지 정치범들의 사면만 요구할 뿐이었다.

하지만 망각 협정으로 과거사 청산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전역에 걸쳐 있는 암매장, 공개 처형 장소 발굴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내전과 독재 정권의 피해자들은 보상 받지 못했다.

◇역사기억법=겉으로는 평화와 공존의 길을 걷고 있던 스페인에서는 2000년대 들어 과거사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다. 지난 2002년 좌파정당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페롤에서 광장에 서있던 프랑코 기마동상을 박물관으로 옮긴 것을 계기로 과거사 청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페롤은 프랑코의 출생지로 우파들에겐 성지와 같은 곳이다.

2004년 5월 프랑코재단에 매년 지원하던 연간 15만 유로의 지원금을 폐지한 데 이어 9월에는 ‘프랑코 정권과 내전의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조사를 위한 범정부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또 2006년을 ‘기억의 해’로 지정하는 법안이 제출됐다. 국민당의 반발이 있었지만 제2공화정 수립 75주년을 맞아 2006년 6월 스페인 의회는 2006년을 ‘기억의 해’로 선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7년에는 과거사 청산작업의 핵심인 ‘역사 기억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집단매장지 발굴이다. 내전 실종자는 최대 1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당시까지 발굴된 유해는 500구 뿐이었다. 법안은 유해 발굴 작업을 민간부문에서 진행하도록 하되 정부나 지자체가 의무적으로 협조해야한다고 적시했다. 또한 프랑코 정권의 기념조형물은 철거하도록 했다.

가장 대표적인 내전 기념조형물인 ‘전몰자의 계곡’에서는 프랑코의 기일에 추도미사를 진행할 수 있으나 정치적 행위를 하면 처벌 받는다.

역사기억법이 제정된 지 1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청산작업은 진행 중이다. 프랑코 묘지 이전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서는 스페인 과거사 청산 방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독일이 철저한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한 단호한 처벌, 보상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스페인은 희생자 보상을 중심으로 화합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부 주도 학살지 조사, 독재 기간 구속됐던 정치범들의 복권, 전몰자 계곡에 독재정권 억압을 다룬 기념물 설치 등이 제안됐지만 모두 거절됐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kimyh@kwangju.co.kr

스페인 = 글 김용희·사진 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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