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과거사 정리로 본 5·18의 과제] <5> 제주 4·3사건
“죽은 이는 부디 눈 감으시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아라”
2018년 09월 12일(수) 00:00

제주4·3평화공원에 조성된 4·3사건 행방불명인 표석. 대부분 육지 형무소에 수감돼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로, 형무소 지역별로 제주 2012기, 경인 554기, 영남 449기, 호남 390기, 대전 270기, 예비검속 220기 등 총 3895기가 세워져 있다.

제주 4·3 사건은 특별법에 의한 진상규명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광주 5·18이 참조할 점이 많다. 4·3은 우리나라 최초로 정부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며 제주도민들의 오랜 한이 상당 부분 풀렸다. 4·3사건 또한 5·18처럼 북한이 깊은 관여를 했다는 역사왜곡이 있었지만 조사보고서가 발표되며 모두 날조됐다는 것이 드러났다. 진상규명 문제가 해결된 4·3은 올해 70주년을 맞아 상생과 화합의 시대를 기약하고 있다.



◇4·3사건 경위=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월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좌파 진영의 제주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약칭)이 기념집회를 열었고 제주북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친 군중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같은달 14일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3·1사건이 일종의 폭동이며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듬해 4월3일까지 2500명이 구금됐다. 특히 1947년 11월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자 전국적으로 총파업이 일어났고 제주도에서는 이듬해 3월 파업주동자로 몰려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며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께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같은해 11월 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으며, 이후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 충돌이 계속되면서 이 과정에서 2만~3만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제주 도민까지 희생됐다.

1948년 11월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수용자들


◇5·18 청문회로 촉발된 제주 4·3 진실찾기=여순사건과 마찬가지로 제주 4·3도 오랜 기간 언급이 금기시됐다. 이유도 모른채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 가족들은 ‘빨갱이’ 누명을 쓰고 숨죽여 살아왔고 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때문에 아무런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같은해 5월23일 국회에서 거창, 함양 등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조사단이 구성된다.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은 4·3사건 진상도 조사해야 한다고 발의했고 같은해 6월6일 하루 동안 4·3 진상조사를 실시하도록 결정됐다. 당시 제주신보에서 6월 2일자 사고(社告)를 내고 ‘4·3사건 및 6·25당시 양민학살 진상규명신고서’를 3일 동안 접수한 결과, 피해 건수는 총 1259건, 인명피해 1457명에 달했다.

하지만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다시 중단됐다. 진상조사에 나섰던 제주신보사 신두방 전무가 구속됐고, 진상규명을 호소했던 모슬포 유족들도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경찰은 ‘백조일손 위령비’를 부숴서 땅속에 파묻어 버리기까지 했다.

역사 속에 묻혔던 4·3은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이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에 담아냄으로써 그 진상과 상처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작가 또한 4·3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조사를 받아야 했다.

4·3에 대한 본격적인 진상규명 분위기는 1988년 5·18 국회청문회를 계기로 촉발됐다. 당시 TV를 통해 청문회를 시청하던 제주도민들은 국회의원들이 5·18 당시 계엄군의 착검 유·무를 따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용기를 얻었다. 광주시민들이 연좌제를 걱정하지 않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증언하는 모습을 통해 제주도민 사이에서는 “4·3에 대해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자라났다. 제주신문이 1989년 4월 3일을 맞아 4·3 증언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 로 이어져 1998년까지 5권의 책으로 출간될 만큼 수많은 제주도민들의 증언이 나왔다.

진상규명 분위기는 50주년을 앞두고 고조됐고 1997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1999년 12월 ‘4 3특별법(안)’이 제출됐고 같은 달 16일 국회는 ‘제주4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본격적인 4·3사건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된 지 만 10여 년만의 결실이었다.

1949년 3월 부녀자들이 죽창을 들고 마을 보초를 서고 있다.


◇우리나라 첫 정부 공식 진상조사보고서 채택=특별법에 의거, 2000년 8월28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했다. 국무총리(위원장)를 포함해 법무부장관, 국방부장관, 행정자치부장관, 보건복지부장관, 기획예산처장관, 법제처장, 제주도지사와 국무총리가 위촉한 유족 대표, 관련 전문가 등 20명으로 구성됐다.

또 2001년 1월17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도 별도 설치됐다. 당시 단장은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였다. 기획단 산하 상근 진상조사팀으로 전문위원 5명과 조사요원 15명 등 20명이 편성됐다. 진상조사팀 팀장은 양조훈 수석전문위원(현 4·3평화재단 이사장)이 맡았다.

양 이사장은 “제주도민들은 특별법 시행령을 둘러싸고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수많은 투쟁을 했다”며 “그 결과 원래 진상조사팀 전문위원은 2명이었지만 5명까지 늘렸고 전문조사관도 둘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진상조사는 결국 사람이 하는 만큼 인적 구성에 제주도민의 염원을 관철시키도록 노력한 것이다.

진상조사는 2년 동안 4·3사건 관련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6개월 이내에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는 규정에 따라 2000년 9월 조사에 착수, 2003년 2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진행됐다. 4·3관련 국내 자료가 희박한 상황에서 조사위원 3명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상주하며 미국 자료 조사에 집중했다.

철저한 진상조사도 중요하지만 보고서 작성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만큼 2003년 3월 29일 진상조사보고서를 심의·의결했고 같은 해 9월 말까지 33건의 수정안을 반영해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 발표됐다. 이는 우리나라 정부 첫 공식 조사보고서로 제주 4·3의 한 매듭을 짓게 됐다.

◇민간인 희생자·경찰·군인 영령 한자리에=지난 2003년은 제주도민들에게 뜻깊은 해이다. 4·3 때 주민이 희생된 제주 애월읍 하귀마을 주민들은 위령단을 세운다. 위령단에는 4·3희생자 뿐 아니라 애국열사, 호국영령을 함께 모셨다. 그동안 대립했던 민간인 희생자, 경찰, 군인 영령을 한자리 모은 것이다. 10년 후인 지난 2013년 4·3유족회와 경찰 유족으로 구성된 경우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화해·상생을 선언했다.

제주 4·3은 현재 진상규명 국면을 넘어 화해와 상생, 평화를 위한 기념사업에 중심을 두고 있다. 지난 2008년 조성된 제주4·3평화공원은 올해 처음으로 방문객 60만명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또 매년 4만7000개씩 만들던 4·3상징물인 동백꽃 뱃지도 내년에는 70만개 수준으로 확대 제작할 예정이다.

추가 진상조사도 진행되고 있다. 개개 사건에 대한 규명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제주특별자치도와 4·3재단의 주관으로 2012~2016년 1차 조사에 이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말까지 2차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4·3재단 창립 10주년을 맞아 첫 조직개편을 실시, ‘조사연구실’도 신설됐다. 조사연구실은 4·3추가진상조사와 정책 연구, 아카이브 구축 등의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다. 또 미국·일본 등 해외 4·3사료조사도 추진한다.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은 “광주 5·18 진상조사는 조사위원들이 의지를 갖고 업무를 추진하면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며 “70개 조항에 이르는 5·18진상규명특별법과 달리 제주 4·3특별법은 14개 조로 구성되고 벌칙 조항도 없는 등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아 진상규명에 한계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사진·글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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