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의 ‘그림 생각’ (232) 탁족(濯足)
2018년 07월 26일(목) 00:00
속세 떠난 선비 발 씻으며 후일 도모하였을까

이경윤 작 ‘고사탁족도’

작열하는 태양, 잠 못 이루게 하는 최악의 열대야, 열흘 넘게 이어진 폭염 기록행진은 찜통과 용광로 더위 등 더 뜨거운 온도를 상상하게 하는 단어를 총동원하게 한다. 열돔에 갇힌 듯 숨이 턱턱 막히는 올 여름 이 살인적 더위는 우리 인간을 참으로 당황스럽게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기후가 갈수록 이상고온인 것도 사실이지만 냉방시설에 길들여진 우리들이 좀처럼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데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옛 우리 선조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즐기는 최상의 풍속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을 꼽았고 또 그것만으로도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냇물에 발을 담근 선비의 그림인 ‘탁족도’를 다수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인 것 같다.

왕족 출신의 사대부 화가 이경윤(1545~1611)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는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선비와 정병 모양의 술병을 들고 있는 동자를 그린 전형적인 탁족도 형식의 그림이다. 얼마나 더웠는지 윗옷은 가슴까지 풀어헤치고 무릎 위로 바지를 걷어 올린 채 발을 꼬고 시원해하고 있다. 근경의 바위는 물에 잠긴 상황을 묘사하려는지 짙은 먹빛으로 처리되고 냇물의 윗부분은 은은하게 동심원이 퍼져나가 동적인 기운이 감돈다.

그림의 내용은 중국 초나라의 굴원(기원전 343~278)이 멱라수에 투신하기 전날 강둑을 거닐다가 어부를 만나 주고받았다는 시와 관련이 깊다. 세상과 타협할 수 없었던 굴원에게 어부가 던진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라는 싯귀가 이 탁족도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 속 한가로워 보이는 선비는 정의가 무너진 어지러운 속세를 미련 없이 떠나 발 씻으며 후일을 도모하였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탁족은 피서의 의미를 넘어 군자의 이상, 덕목, 지혜를 아우르는 상징이기도 했다.

<광주비엔날레 정책기획실장·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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