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5·18 ⑧ 옛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의 진실
2018년 07월 04일(수) 00:00
3공수 민간차량에 총 난사…시민 학살하고 “습격받았다” 조작
“시위대 오면 무조건 쏘라했다” 증언…28명 사망
‘북한 배후 교도소 습격설’ 주장한 전두환 피소
암매장 발굴·사적지 ‘민주인권파크’ 조성 과제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3공수여단이 광주~담양간 도로 봉쇄작전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했던 옛 광주교도소 전경. <광주일보 자료사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3공수여단은 1980년 5월21일 오후 옛 광주교도소로 투입된다. 수감자들의 탈주를 막고 전남대 인근에서 붙잡은 시위대를 조사하는 장소로 사용하려는 목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담양간 도로 봉쇄작전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컸다. 당시 신군부는 5·18민중항쟁의 확산을 가장 우려했다. 담양 방면의 민간인 출입을 막아 항쟁의 북상을 원천 차단했다.

3공수여단이 머문 5월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광주교도소에서는 민간인 학살, 암매장, 가혹행위 등이 자행된다. 아직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습격설’을 주장하며 5·18을 왜곡하고 있고, 교도소에서 숨진 광주시민의 시신 12구는 찾지 못한 상황이다. 왜곡, 암매장 등은 오는 9월 출범하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밝혀야할 범위다.

신순용(가운데) 전 3공수여단 소령이 옛 교도소에서 암매장 장소를 설명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봉쇄작전과 민간인 학살·암매장=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은 본부대대·11·12·13·15·16대대 장교 265명, 사병 1261명 규모였다. 이들은 높이 5m 교도소 담장 밖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으며, 교도소 내부에는 본부대대와 보안대 요원 등이 있었다. 11대대는 교도소 정문, 12대대는 교도소 남쪽, 13대대는 지금의 각화농산물도매시장 방면인 교도소 동쪽, 15대대는 광주~담양간 도로가 있는 교도소 서쪽, 16대대는 교도소 북쪽 방면의 방비를 맡았다. 벽 모서리 마다 있는 교도소 감시탑에는 M-60기관총이 설치됐다.

11대대 소속 지역대장 신순용 전 소령은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접근하는 시위대는 무조건 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15대대 소속 김연철 전 하사도 같은 내용의 명령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신 전 소령은 5월22일께 정문으로 접근하는 시위차량에 부대원과 함께 M-16 소총으로 사격을 가해 전복시켰다고 했다. 또 다른 부대원은 지난해 5·18기념재단에 광주에서 담양 방면으로 돌파하려는 시위차량이 기관총 사격을 받아 도랑으로 굴러떨어졌다고 전했다.

증언집 등에 따르면 5월21일 오후 8시께 담양 주민 4명이 광주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트럭을 몰고가다 집중 사격을 받았다. 고규석(당시 39세), 임은택(당시 35세)가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22일 오전 10시께에는 김성수(당시 46세)씨가 아내 김춘화(당시 43세), 딸 김내향(당시 5세)양과 함께 진도 집으로 가다 총을 맞았다. 가족 모두 살아남았지만 딸은 하반신이 마비됐고 아내는 5년 뒤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진행된 옛 교도소 암매장 추정지 발굴 조사. <광주일보 자료사진>






서만오(당시 25세)씨는 5월 22일 청각장애인 동생을 찾기 위해서 시위 차량을 타고 담양군 창평면 쪽으로 가다가 총격을 받았도 항쟁 이후 교도소 앞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교도소에서 사망한 광주시민은 최대 28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중 11구는 교도소 안팍에 묻혀 있는 채로 발견됐다.

암매장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검찰조사에서 본부대대 소속 김모 소령은 “정보참모로부터 여단장의 지시를 전달받아 가매장할 장소를 제가 물색했고, 저희 본부대 병력들이 의무대로 가서 사체를 운반해 와서 매장했다”고 진술했다. 신 전 소령도 윗선에서 민간인 사살 사실을 드러내기 싫어하니 자체 판단에 의해 암매장했다고 밝혔다.

5·18기념재단은 지난해 11월부터 교도소 부지에서 암매장 발굴조사를 진행했지만 뚜렷한 흔적은 찾지 못했다.

◇교도소 습격설=신군부는 민간인 사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교도소 습격설’을 만들어낸다. 광주시민들이 교도소 수감자를 탈옥시켜 폭동에 참여시키려했다는 논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시위대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총 6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교도소 습격했으며, 이는 미전향장기수, 간첩, 강력범 등을 해방시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을 담아 5·18기념재단 측으로부터 피소됐다. 재판부는 ‘당시 시위대 인원이나 무장의 정도는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고, 교도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인근 거점을 방비하던 3공수여단의 일부 병력과 교전이 이뤄진 것’이라고 5·18재단의 손을 들어줬다

최근 ‘교도소 습격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록이 처음 확인됐다. 김희송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연구교수가 공개한 31사단 전투상보 작전요도에 따르면 3공수여단에 앞서 광주교도소를 지키던 31사단은 시위대와 20여차례 조우했으나, 이들을 설득해 자진 철수시켰다. 당시 31사단은 실탄을 지급받고 있었던 상황으로, 5월21일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15∼16회 난동자와 조우했지만 수색중대장의 설득·권유로 자진 철수했다고 기재돼 있다. 또 ‘5월21일 오후 1시∼5시 5∼6회 난동자와 조우, 11경비대대장의 권고·설득으로 자진철수’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31사단이 3공수여단으로 교체된 시점부터는 사살이 시작되는 등 상황이 급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혹했던 교도소 내부=총알이 빗발치는 교도소 외부가 전쟁터였다면 시위대를 가뒀던 교도소 내부는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지난 2014년 발간된 ‘광주교도소史’와 1995년 검찰 조서를 살펴보면 당시 광주교도소 수감자는 2700여명으로, 추가 연행된 시위대 427명은 공간 부족으로 수감시설이 아닌 창고에 갇혔다.

당시 교도관이었던 홍인표씨는 지난 1989년 국회 청문회에 참석해 5·18 때의 참상을 설명했다. 홍씨에 따르면 보안대 요원들이 연행자들을 조사할 때는 옆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지키며 곤봉을 휘둘렀고 가혹행위로 1명이 죽어나갔다는 소문도 돌았다. 교도관 숙소까지 연행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려 잠을 못 이룰 때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연행됐던 시민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수한 구타가 있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최병옥씨는 증언집에서 “군인들이 물 한 모금 없이 건빵 한 봉지를 주면서 두세 사람이 나눠 먹으라고 했다”며 “저녁에 잠을 잘 때 모기가 물어 조금 움직이면 불러내서 매 타작을 했다”고 밝혔다.

김재언씨는 “끌려온 다음날 아침에 주위를 둘러보니 몇 사람이 그대로 누워 있었고 눈과 코, 입에는 파리떼가 붙어 있었다”며 “밤 사이 고통에 못 이겨 소리없이 죽어간 사람들로 보였고, 군인들이 이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살아야 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옛 광주교도소 방치와 미래=지난 1998년 옛 광주교도소는 5·18사적 제22호로 지정되며 정문 앞에 사적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오월길 안내 조형물은 인근 상가에서 놓아둔 건축자재로 뒤덮여 있고 주변에 커피자판기가 놓여진 탓에 흡연구역이 되면서 담배꽁초와 종이컵 등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 있다. 이 때문에 5월 역사 탐방을 온 탐방객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조차 이 곳에 5·18사적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매년 불거지는 문제지만 행정적 조치는 일시적으로, 각 자치단체를 비롯한 주변 상가, 광주시민들이 함께 노력해야할 문제이다.

지난 2016년 교도소가 삼각동으로 이전하며 옛 광주교도소 부지(10만6771㎡)는 현재 방치되고 있는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교도소 부지에 민주·인권기념파크를 조성한다는 사업 계획을 마련했다. 광주시의 ‘민주·인권·평화’ 이미지에 맞춰 예산 1175억원을 투입해 유엔인권교육훈련센터와 솔로몬 로(law)파크, 한국민주주의 전당을 짓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지난 2014년 기본계획이 발표된 뒤 전반적은 사업 추진은 진척이 없고, 광주·창원·서울을 삼각 축으로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한국민주주의 전당도 전국적으로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 확보 방안으로, 일각에서는 사업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용섭 신임 광주시장은 지난 6월 ‘민주인권평화중심도시추진 시민위원회’(가칭)를 구성해 민주인권파크 조성사업을 조속히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다. 민주인권기념파크 내에 ‘광주시민대학’ 개설을 정부에 건의하는 한편, 행정과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중간 지원조직인 ‘인권평화재단’ 설립도 논의한다는 방침이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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