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호남지 제7부-전통 정원과 건축] ④ 공동체 예도문화를 드높인 운조루의 선비문화
2017년 09월 19일(화) 00:00
‘금귀몰니’ 명당에 240년 고택 … 조선후기 양반가 생활상 한눈에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하고 있는 운조루는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역임했던 유이주(柳爾胄)가 1776년(영조 52년)에 건립한 조선시대 양반가의 주택이다.

유이주가 이 곳에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 크기 만 한 돌거북이 출토되었기에 이 곳을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자리라고도 불린다. 특히 이 집터는 뒤편으로 지리산 노고단이 능선을 이루고, 마을 앞으로 섬진강 물줄기가 흘러 배산임수의 명당으로도 입지환경을 갖추고 있다.

운조루(雲鳥樓)라는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싯구절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운’과 ‘조’를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운조루는 크게 남자 주인이 머무는 사랑채, 여자 주인의 공간인 안채, 노비나 하인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그리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조루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양반집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솟을대문이 있다. 대문의 홍살에는 주술적인 민속신앙으로 말머리의 뼈가 걸려 있다.

대문 양옆으로 19칸이나 되는 행랑채는 동서 방향으로 길게 담장을 대신하여 배치되어 있다. 당시 행랑채에는 노비가 거취하거나 행인이 숙박을 하기도 하였고, 농기구를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 멀리서 오는 조객의 참배를 위해 석 달간 시신을 보관했던 가빈터도 있다.

행랑을 지나면 좌측 정면에 편평한 사랑마당이 전개되고 그 건너에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마당에는 이 집을 지은 유이주가 중국에 다녀오면서 선물로 받아 심었다는 위석류라는 희귀한 나무가 있다. 그 외에 회양목 등 귀한 나무들이 집을 지을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자연석의 높은 기단은 양반가의 지위를 상징하기 위함이다.

대문에서 곧장 경사진 돌길을 따라가면 동편에는 아랫사랑에 이르고 서편으로 굽어 돌아가면 큰 디딤목이 놓여있는 큰사랑 툇마루에 이른다. 마루에 사용된 목재는 이음새가 없는 긴 부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목재는 지리산속의 때 묻지 않고 울창한 숲에서 채취한 것으로 주인의 성품과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주인은 큰사랑채에 기거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재웠다. 큰사랑채는 우측으로부터 사랑방과 대청 루마루로 이어진다. 큰사랑 건축구조는 높이 1.2m 가량의 자연석 기단 위에 초석이 놓이고, 두리기둥이 세워졌다. 기둥 위로는 도리를 걸은 3량 구조에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사랑방의 문은 작고 턱이 높게 되어있는데, 이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멈춰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려는 겸손을 배우기 위한 지혜인 듯하다. 3개의 대들보로 받쳐진 사랑채의 천장은 사다리형 대공을 쓰였다.

대청은 고전시집이나 수필, 문집, 서당교재 등이 보관되어 학문을 닦던 곳인데 현재는 이러한 책들이 각처로 분산되어 관리되고 있다. 북쪽 벽에 붙은 네모난 창을 열면 후원의 풍경이 액자에 담겨진 그림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대청마루 천정에 쓰인 기록을 통해 이 집이 1776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전면 좌측에는 주인이 책을 읽거나 인간의 이상을 키워가는 정신적 공간인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는 세 방향이 시원하게 열려있고 그 주변에는 정교하게 짜인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 위에는 원형의 두겁대를 설치하고 밑받침은 연화무늬의 초각봉우리로 된 계자각이 받치고 있어 흡사 궁궐을 연상케 한다. 이 곳에서 주인은 하인들을 불러 집안일을 지시하는 권위의 공간으로도 활용하였다. 마루 밑에는 당시 이 집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레가 보존되어 있다.

아래사랑채는 큰 사랑채에 잇대어 ㄱ자형으로 이어진다. 아래사랑채는 이 집의 자녀가 공부하는 공부방, 식객들이 잠시 유숙하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공부방 앞에 붙은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글귀는 당시 학문에 전념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상상케 해준다. 아래사랑채 마루 역시 기다란 소나무 장목으로 만들어져 있어 양반집안의 권위를 나타낸다.

사랑채를 지나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문간이 나온다. 여기에는 사랑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가 있고, 쌀통과 쌀뒤주 볼 수 있다. 쌀통은 나무 속을 송두리째 파서 만들어 당시 부유했던 사대부가의 경제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쌀뒤주를 중문간에 둔 이유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중문간에는 두 개의 문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사랑채 뒤에 있는 사랑뒷마당으로 통한다. 이문은 남자 주인이나 그와 아주 친밀한 교분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이용하였던 문이다. 또 하나의 동편문은 주로 여인들이 이용하는 문으로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안마당은 조선시대 양반가 여인들의 폐쇄적인 공간이면서도 여인들끼리의 소통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사방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ㅁ자형 배치구조를 하고 있다. ㅁ자형 배치구조는 조선 중기 이후 영남지역 양반가에서 즐겨 채택되었던 평면구조이다. 호남지방에서는 일자형의 배치구조가 보편적이지만 건축주인 유이주가 영남태생이었다는 점으로 영남 스타일인 ‘ㅁ자형’ 운조루의 탄생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마당은 현실적으로 집안의 모든 가사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부엌구역, 중앙에는 안주인이 거처하는 대청과 안방이 있고, 북동편에 건너방과 며느리방, 부엌이 남쪽으로 연결된다. 안마당 남쪽 장독대 뒤로는 곳간이 있는데 곡식을 넣어두었던 커다란 항아리와 커다란 궤짝모양의 뒤주를 볼 수 있어 이 집의 옛 살림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대청에는 중앙이 위로 휜 대들보가 사용되었다. 종도리 아래로만 작은 판대공을 놓고 나머지는 대공없이 서까래를 걸친 다소 특이한 구조이다. 기둥은 전면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다. 부엌 문턱은 가운데가 낮게 곡선 처리되어 드나듦이 편해 보이고, 부엌에서 나와 안방과 대청으로 통하는 토방 기단의 높이를 점차 높여 여인네들의 생활이 편리하게 배려되었다. 부엌 왼쪽에는 술과 김치, 마른 고기 등을 보관하는 광이 있다. 부엌을 벗어난 뒤뜰은 여성만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에는 두레박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의 한 쪽 벽이 막아져 있어 여성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주고 있다. 마당 끝에 있는 문은 평상시는 사용되지 않으나, 집안에 특별한 행사가 있어 불가피한 경우에만 사랑채 연결 통로로 사용된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사당은 일반적으로 안채의 동쪽 통로에 연결되어 북쪽에 두도록 되어 있다. 운조루의 사당도 안채보다는 조금 떨어진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고,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정면에는 중앙으로 여닫는 쌍여닫이 띠살문이 달려 있고 양측 상단에도 정자살창이 있어 개방감을 준다. 사당 내부에는 통판으로 제상(祭床)을 대용하여 4개의 감실이 설치되고 그 안에 조상들을 모시는 위패가 있다. 사망 후 3년상을 치른 후 이곳에 위패를 모시고 명절이나 특정한 날에 제사를 지낸다.

운조루는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서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규모 및 구조는 조선 왕조의 양반가옥의 모습이며, 배치구조는 조선시대 유교적 사고체계에 의한 공간의 위계성 및 구심성이 잘 드러나 있다. 유이주에 의해 7년 여의 기간에 완성된 운조루는 안채 36칸, 사랑채 16칸, 행랑채 24칸, 사당 2칸으로 모두 78칸이었다. 몇 번의 복원과 보수를 거쳐 현재는 73칸이다. 전국적으로 150년 이상된 30칸 이상의 고가는 20여 채 밖에 없다. 1968년에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 신웅주 조선대 건축학부 교수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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