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놀란 호남의 탁월한 선택
2016년 04월 22일(금) 00:00
어느 후보가 선거 사무실 앞에 이렇게 써 붙였다. ‘작지만 강한 남자’. 체구는 왜소하지만 힘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한데 강풍이 불어서 맨 앞 낱말의 받침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결국 ‘거시기’만 강한 남자가 된 그는 아줌마들의 몰표를 받아 당선됐다고 한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좀 싱거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 후보의 당선 소감이 재미있다. “선거는 역시 바람입니다.”

지난주에 치러진 20대 총선에서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산들거리던 미풍은 선거 종반에 이르러 회오리바람으로 변했다. 온 산야(山野)가 연두색으로 물들어가던 그 따스한 봄날에 불어닥친 ‘녹색 돌풍’이었다.

호남 지역만을 놓고 보면 ‘국민의당에 의한 국민의당을 위한 국민의당의 선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국민의당은 정당득표율에서는 더민주에 앞서 제1야당이 됐다. 이렇게까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치평론가들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자화자찬이지만 광주일보만이 정확한 흐름을 감지했다.

선거 초기의 일이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광주에서 각각 몇 석을 차지할 것인가? 이를 놓고 갑론을박하며 사람들이 내기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4대4로 반분될 것이다, 2대6으로 더민주가 열세를 보일 것이다. 그렇게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광주일보는, 7대1 혹은 8석 전석 석권으로 국민의당의 압승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기사와 칼럼에 반영했다. 광주일보의 논조에 의아해 하며 갈피를 못 잡던 다른 신문들은, 총선이 끝난 후 결과가 나오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광주에서 시작된 바람은 들불처럼 전남으로 번졌다. 더민주 소속 후보들은 비바람에 꽃잎 지듯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래도 이개호 의원(담양·함평·영광·장성)만이 공동묘지에 홀로 핀 꽃처럼 살아남았다. 이 의원은 거센 돌풍 속에서도 어떻게 꺾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30여 년 전 도청 사무관 시절부터 그를 눈여겨보아 온 터라, 몇 가지 승리 요인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역대 도지사들이 한결같이 인정한 그의 업무 처리 능력이다. 여기에 그가 갖고 있는 특유의 친화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그의 독자 생환은, 더민주가 호남의 다른 지역에서도 공천만 잘했더라면 이처럼 처참한 결과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임을 말해 준다. 호남 유권자들을 무시하며 막대기만 꽃아 놓아도 당선될 것으로 생각했던 지도부의 안이한 판단이 선거 참패를 불렀다는 얘기다.

아무튼 이번 4·13총선은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16년 만에 여소야대 구도로, 20년 만에 다당(多黨)체제로 바뀌는 격변이 일어났다. 역사적인 3당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당선자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던 그날 새벽,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개표 방송을 보는데 이런 말이 떠올랐다. ‘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는, 민심이 그만큼 무섭다는 말이다. 당나라 재상 위징(魏徵)이 했던 이 말. 왜 그때 갑자기 떠올랐을까.

물 같이 순하던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는 성난 파도가 되어 두 개의 배를 뒤엎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하나의 배는 호남에서 참패한 더민주당이요 또 하나의 배는 전국적으로 준엄한 심판을 받은 새누리당이다. 참으로 절묘한 선택이었으니 점잖게 말하면 일석이조(一石二鳥)요, 속되게 말하면 ‘일타양피’(고스톱 용어)였다. 고요했던 민심의 바다는 한순간에 격랑(激浪: 거센 파도)이 되었다. 그것은 특히 호남 유권자들을 더 이상 물로 보지 말라는 경종이기도 했다.

물론 선거 때마다 높은 투표율과 몰표로 인해 구시대적이라는, 호남인들에 대한 일부의 냉소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투표 행위에는 단순한 지역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간절함이 있다. 그 간절함은 약자와 소외된 이들이 정당하게 대접받는 정치 구도에 대한 갈구(渴求)다. 호남인들이 ‘집단 지성’의 힘으로 늘 정권교체를 위한 전략적 선택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제1당의 자리를 내주고 제2당으로 주저앉은 집권 여당의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부터 새누리당 대표 회의실에 걸렸던 그들의 메인슬로건은, 아무도 몰랐던 그들의 앞날을 미리 말해 주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한 방에 훅 간다.” 새누리당에 보내는 누리꾼들의 쓴소리를 공모해 채택했다는 그 홍보 문안대로, 그들은 설마 했다가 그야말로 한 방에 훅 가고 말았다.

이번 선거는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보여 주었다. 집권당에 대한 분노로 비호남권은 더민주당을 지지했고, 더민주당에 대한 분노로 호남권은 국민의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왜 이렇게 분노가 켜켜이 쌓였을까? 그거야 모두들 다 아는 바 아닌가. 거듭된 잘못에도 그들은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묻지도 않았고, 마지못해 사과할 때도 오로지 표를 위해 잠시 엎드렸을 뿐이다.

다만 국민의당 역시 그들이 잘해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닌 만큼, 언제든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새겨야 할 것이다. 이번 총선 승리가 내년 대선에서는 독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안철수 대표 또한 마찬가지다.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지 말입니다.” 그렇게 송중기 흉내를 내는 것이야 상관할 바 아니지만, 차제에 호남 정치를 복원하지 못한 채 권력 다툼에만 나선다면, 언제 또 쓴맛을 볼지 모른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성호 이익 선생은 ‘경명’(鏡銘)에서 이렇게 썼다. “얼굴에 때 묻어도 사람들은 말 안 하지. 그래서 거울은 말없이 모습 비춰 허물을 보여 준다네.(以故鏡不言 寫影以示咎)” 그렇다. 자기 얼굴에 묻은 때는 남들이 얘기를 안 해 주면 잘 모르지만, 곁에 거울이 있으면 수시로 비춰 보아 금방 알 수 있다.

이번 총선이 주는 교훈 중 하나가 바로 그것 아닐까?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은 거울 하나쯤 곁에 준비해 두고, 수시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라는 것. 거울은 참회와 자기반성의 도구이니 말이다.

시인 윤동주는 밤이면 밤마다 구리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자신을 성찰했다. 그리고 이런 시를 남겼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선량들이여! 그대들 또한 동주처럼 그런 굳센 맹세, 할 수 있겠는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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