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자민련’이면 또 어떠한가
2016년 04월 08일(금) 00:00
봄비가 다녀가셨다. 우리의 마음까지 환하게 했던 벚꽃도, 비바람에 속절없이 꽃잎을 떨군다. 땅 위에 소복이 떨어진 꽃잎이 생선 비늘을 닮았다. 그토록 흐드러지게 피었던 순천 동천의 벚꽃 역시 지금쯤은 다 지고 말았으려나?

엊그제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 순천을 다녀왔다. 옥천(玉川)과 함께 이수(二水)의 하나인 동천(東川)은 순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이다.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천변 꽃길을 걸으며 꽃향기에 흠뻑 취했다. 군데군데 늘어진 수양버들도 연초록 새순을 틔우고 있었다. 여기저기 연인들은 꽃 속에 묻혀 꽃이 되었다.

순천만까지 걷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아랫장’ 부근에서 돌아 나오기로 한다. 마침 점심때라 허기(虛飢)도 몰려오고 해서 택시를 잡았다. 곧바로 택시 기사에게 묻는다. 선거철인데 이곳 순천 분위기는 어떤가요?

재작년인가. ‘대구의 김부겸·순천의 이정현’을 글감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땐 이정현이 당선됐지만 이번엔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택시 기사는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말문을 연다. “팽팽할 것 같애라우. 그래도 국회의원이락하면 순천에 박씨 하나쯤은 물어다 줘야 된께로…” 그렇게 넌지시 지지자를 밝히는데, 아마도 ‘예산폭탄’을 ‘흥부의 박씨’에 비유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그나저나 대구의 김부겸은 이번만큼은 크게 앞서고 있다니 다행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원로 언론인들이 만드는 조그만 신문이 도착해 있다. 문득 한 줄 제목에 시선이 꽂힌다. “기자 40년에 이런 3공(空) 선거 처음 본다” ‘3공 선거’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고? 바로 그 아래 붙은 소제목을 보니 의문이 풀린다. 1. 공천(空천)-또 갈라 먹기 그 사람들이네. 2. 공약(空약)-도돌이표 약속 이젠 지겹다. 3. 공표(空표)-누구를 찍어 달라는 말이냐.

이번 선거의 특징을 딱 집어낸 기발한 표현이다. 역시 신문쟁이들이라 다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총선은 공천 과정에서부터 참으로 어지러웠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향식 공천이니 개혁 공천이니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신선한 공약도 참신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호남 유권자들은 기분이 좋다. 2번이냐 3번이냐, 참으로 오랜만에 골라 찍는 재미를 누릴 수 있게 됐으니까. 야당이 둘로 갈라진 덕분이다. 이리저리 곰곰 생각했다가도, 투표소에만 들어가면 하는 수 없이 2번을 찍어야 했던 세월이 그 얼마였던가.

하지만 이번 선거도 생각보다 싱겁게 끝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애초 더불어민주당(더민주)과 국민의당의 치열한 싸움이 예상됐지만, 아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당이 광주에서 8석 전석을 송두리째 석권할 기세다.

일부에서는 그렇게 해서 국민의당이 ‘호남 자민련’이 될 것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호남 자민련’이면 또 어떤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수십 년 여당에 버림받고, 기껏 밀어주었던 야당에게도 뺨 맞고, 이제는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정권교체야 나중 일이고, 전략투표니 하는 것도 호사가들의 말일 뿐이고, 차라리 ‘호남당’ 소리 듣더라도 실속을 좀 챙겨야겠다는 속내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됐든 ‘녹색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광주·전남에서 시작된 바람은 돌풍이 되어 전북을 지나고, 이제는 수도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국민의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더민주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더민주의 친노 운동권 세력은 -아마 생래적(生來的)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변화를 읽지 못했다. 과거 그들을 전폭적으로 밀어주었지만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호남 사람이 많고, 그렇게 민심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죽하면 이번에 광주의 한 후보가 자기 당의 전 대표더러 제발 물러나라고 삼보일배까지 하는 촌극이 벌어졌겠는가.

더민주는 뒤늦게 호남 지역의 ‘반문’(반 문재인) 정서를 깨닫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인 김종인 대표를 빌려 왔지만, 이 또한 크나큰 실수였다. 하필이면 국보위 출신이란 말인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경제 민주화’ 역시 이미 한 번 우려먹은 철 지난 구호였으니, 유권자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봄비 한 번 다녀가시더니 비엔날레 거리의 벚꽃도 하릴없이 지고 있다. 지는 것은 벚꽃만이 아니어서 호남의 더민주도 함께 지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지만 이 벚꽃 지고 나면 백일홍이 또 꽃망울을 터트릴 것이다.

백일홍은 100일 동안 붉은빛을 잃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꽃이다. 하지만 꽃 한 송이가 100일 동안 피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꽃이 지고 피고를 반복하는데, 그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목백일홍’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출마한 도종환 시인도 당선됐으면 좋겠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백일홍은 선비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꽃나무다. 담양의 명옥헌에만 가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선비들은 1년에 한 번은 꼭 껍질을 벗겨내는 백일홍을 보며 자기 갱신 의지를 다지곤 했다고 한다. 이번 총선에 출마한 이들도 당락을 떠나서, 이처럼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하지 않으면 금방 도태된다는 사실을 가슴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어떻든 국회의원은 국민들보다 똑똑하다. 그들이 잘나서 의원이 됐다면 당연히 똑똑한 것이고, 그들이 못났는데도 의원이 됐다면 그걸 모르고 선출한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

국민들이 총선 출마자나 국회의원들로부터 굽신굽신 절을 받을 날도 이제 5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유권자들이 국회의원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겠다. 왜? “국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로우니까.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나면 국민은 또다시 노예로 전락하니까.” 이는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한 말이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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