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출신 안영임] 미국 동경했던 양호교사, 독일 사회에 녹아들다
2016년 04월 07일(목) 00:00 가가
차라투스트라는 여행자였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 도시를 만나면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소소한 감정에 힘을 빼지 않는 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보낼 풍경은 보내야 한다.
영임은 낙천적으로 삶의 순간순간을 받아들였고, 자기가 보낸 화살을 좇아 욕망에 이글거리는 활처럼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다. 인생은 현재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영임이 살았던 시대에 미국은 지상천국이었다. 미제샴푸와 로션에 황홀해 했고, 혀 꼬부라진 영어는 동경의 표상이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대별되던 냉전시대에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미국은 영임의 로망이었다. 당시 미국 가는 길은 의료계가 가장 쉬웠다. 안영임(77세)은 미국에 갈 욕심에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광양에서 태어나, 광주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영임은 곧바로 서울 한남초등학교 양호교사가 되었다. 미국에 가려고 했지만, 비자 내기가 워낙 어려웠다. 애초에 외국 갈 결심을 했던 그였기에 양호교사는 성에 차지 않았다. 차선책이 독일이었다. 파독 간호사들이 처음 발을 내디디기 시작한 1966년 마감을 하루를 남겨두고 지원을 했다. 결과는 합격.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나이 스물 일곱인 과년한 처녀를 이국만리에 보낼 수 없다,며 노발대발이었다.
“그때 1차로 독일 갔던 간호사들의 기사가 신문에 났는디 얼굴이 안 이뻐서 비행기에서 쫒겨났다든가, 간호사 일이 한국과 다르니 가지 마라든가, 그런 경험담이 실렸당게. 그랑게 집에선 가지 마라고 더 난리제!”
우스갯소리로 남동생은 영임이 합격했다니까 ‘누나가 이쁜가 보네’ 하면서 놀렸다.
3년만 있다 오겠다는 확답을 받고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공항은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다.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영임의 약속은 반 세기가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청운을 안고 독일에 온 영임은 자못 실망했다. 유럽이라면 마냥 화려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독일은 곧바로 견뎌내야 할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덩치 큰 그들에게서 풍기는 체취가 고역이었다. 일명 노랑냄새.
환자를 대할 때나 독일 동료들이 곁을 지나가면 그 체취 때문에 코를 막아야 했다. 게다가 땀이라도 흘리면 질식 직전이었다. 음식문제도 컸다. 빵과 치즈와 햄이 주식이었는데, 영임은 빵을 먹고 난 후 고추장을 먹어야 속이 후련했다.
“독일 사람들은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라 밥도 겁나게 빨리 먹드랑게. 같이 밥을 먹으면 난 반도 못 먹었는데 벌써 그릇 씻고 있당게.”
생면부지의 땅에서 모든 것은 생경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국에 가면 음식이 맞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세월과 함께 음식 습관도 변하는 모양이다.
독일 병원은 간호사들이 음식을 배분한다. 독일말로 ‘굿텐 아페티트(잘 드세요)’를 말하며 각 병실을 돌 때면 그때마다 영임은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간호사인데 이런 일이나 해야 되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았제. 세월이 흐르니까 인정이 되더라고. 독일 간호사는 이렇게 일해야 하는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제.”
처음 근무한 곳은 신생아실이었고, 이후 내과에서 2004년 정년 때까지 일했다. 70년에 파독광부로 왔다가 정치학 공부를 하게 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한국을 무척 그리워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가려던 남편은 마음을 접고 영임 곁에 머물렀다.
“독일에 살면서 한국에 갈 생각을 여러 번 했제. 근데 자신이 없드라고. 남편한테 혼자 가라고 했는데 혼자는 안 간대. 결국 이렇게 늙어가네…….”
국적을 바꿀 때도 남편과 언성이 높아졌다.
“70년에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이스라엘을 여행하는데, 그때만 해도 못 사는 나라이고 잘 알지 못해서인지 뭔 놈의 검사가 그렇게 많은지.”
결국 1988년 독일 국적으로 바꾸었다. 그때 영임과 남편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사 가끔 생각해. 한국 국적을 그대로 놔둘 걸, 하고 말이여.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제.”
영임은 독일에 살면서 외국인이라고 지레 피해의식을 갖지 않으려 노력했다. 독일인들에게는 정확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를 배웠다.
“병원에서 일할 때 독일인 수간호사 에리카가 있었어. 휴, 벌써 그 양반이 아흔이 되었네. 그 사람은 한 번도 우리들을 차별하면서 대한 적이 없어. 간호사로 존중해주었제.”
영임은 특유의 온화함으로 목소리의 옥타브가 올라간 적이 없다. 그의 성품을 좋아하는 파독 간호사들은 투표를 거쳐 베를린 간호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회장이 된 그녀는 건강세미나와 요리, 꽃꽂이, 미술 등 강좌를 열었고, 1년마다 베를린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베를린 한인회 부회장을 두 번이나 거치면서 한인사회의 소통과 통합에 디딤돌이 되었다. 한인 간호사들과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만돌린 악기에 심취하면서 동포사회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인생에서 보낼 풍경을 미련 없이 보내고 살았지만 영임에게도 회한이 남아 있다. 의과공부를 하지 못한 것과 자궁외 임신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 것.
“언젠가 한국에서 조카 딸이 잠깐 왔는데 엄청 이쁘드라고. 애들을 좋아해서 자식을 5명은 낳을라 했는디. 그때 애기가 있었으면 한국에 갔을지도 몰라. 운명은 잘 모르겠어.”
영임은 삶에 대한 강박관념도, 조바심도 없어보인다. 무언가 손아귀에서 달아날까봐 움켜쥐는 욕정도 없다.
그녀의 마음 속엔 큰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누군가는 그 나무 아래서 잠시 머물다 나무를 향해 손짓하고 떠난다. 나무는 그저 웃는다. 인생에서 보내야 할 풍경을 초연히 바라본다. 그저 하루의 향기가 과거의 날을 잊게 만든다고, 웃는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영임은 낙천적으로 삶의 순간순간을 받아들였고, 자기가 보낸 화살을 좇아 욕망에 이글거리는 활처럼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다. 인생은 현재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광양에서 태어나, 광주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영임은 곧바로 서울 한남초등학교 양호교사가 되었다. 미국에 가려고 했지만, 비자 내기가 워낙 어려웠다. 애초에 외국 갈 결심을 했던 그였기에 양호교사는 성에 차지 않았다. 차선책이 독일이었다. 파독 간호사들이 처음 발을 내디디기 시작한 1966년 마감을 하루를 남겨두고 지원을 했다. 결과는 합격.
우스갯소리로 남동생은 영임이 합격했다니까 ‘누나가 이쁜가 보네’ 하면서 놀렸다.
3년만 있다 오겠다는 확답을 받고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공항은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다.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영임의 약속은 반 세기가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청운을 안고 독일에 온 영임은 자못 실망했다. 유럽이라면 마냥 화려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독일은 곧바로 견뎌내야 할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덩치 큰 그들에게서 풍기는 체취가 고역이었다. 일명 노랑냄새.
환자를 대할 때나 독일 동료들이 곁을 지나가면 그 체취 때문에 코를 막아야 했다. 게다가 땀이라도 흘리면 질식 직전이었다. 음식문제도 컸다. 빵과 치즈와 햄이 주식이었는데, 영임은 빵을 먹고 난 후 고추장을 먹어야 속이 후련했다.
“독일 사람들은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라 밥도 겁나게 빨리 먹드랑게. 같이 밥을 먹으면 난 반도 못 먹었는데 벌써 그릇 씻고 있당게.”
생면부지의 땅에서 모든 것은 생경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국에 가면 음식이 맞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세월과 함께 음식 습관도 변하는 모양이다.
독일 병원은 간호사들이 음식을 배분한다. 독일말로 ‘굿텐 아페티트(잘 드세요)’를 말하며 각 병실을 돌 때면 그때마다 영임은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간호사인데 이런 일이나 해야 되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았제. 세월이 흐르니까 인정이 되더라고. 독일 간호사는 이렇게 일해야 하는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제.”
처음 근무한 곳은 신생아실이었고, 이후 내과에서 2004년 정년 때까지 일했다. 70년에 파독광부로 왔다가 정치학 공부를 하게 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한국을 무척 그리워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가려던 남편은 마음을 접고 영임 곁에 머물렀다.
“독일에 살면서 한국에 갈 생각을 여러 번 했제. 근데 자신이 없드라고. 남편한테 혼자 가라고 했는데 혼자는 안 간대. 결국 이렇게 늙어가네…….”
국적을 바꿀 때도 남편과 언성이 높아졌다.
“70년에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이스라엘을 여행하는데, 그때만 해도 못 사는 나라이고 잘 알지 못해서인지 뭔 놈의 검사가 그렇게 많은지.”
결국 1988년 독일 국적으로 바꾸었다. 그때 영임과 남편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사 가끔 생각해. 한국 국적을 그대로 놔둘 걸, 하고 말이여.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제.”
영임은 독일에 살면서 외국인이라고 지레 피해의식을 갖지 않으려 노력했다. 독일인들에게는 정확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를 배웠다.
“병원에서 일할 때 독일인 수간호사 에리카가 있었어. 휴, 벌써 그 양반이 아흔이 되었네. 그 사람은 한 번도 우리들을 차별하면서 대한 적이 없어. 간호사로 존중해주었제.”
영임은 특유의 온화함으로 목소리의 옥타브가 올라간 적이 없다. 그의 성품을 좋아하는 파독 간호사들은 투표를 거쳐 베를린 간호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회장이 된 그녀는 건강세미나와 요리, 꽃꽂이, 미술 등 강좌를 열었고, 1년마다 베를린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베를린 한인회 부회장을 두 번이나 거치면서 한인사회의 소통과 통합에 디딤돌이 되었다. 한인 간호사들과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만돌린 악기에 심취하면서 동포사회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인생에서 보낼 풍경을 미련 없이 보내고 살았지만 영임에게도 회한이 남아 있다. 의과공부를 하지 못한 것과 자궁외 임신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 것.
“언젠가 한국에서 조카 딸이 잠깐 왔는데 엄청 이쁘드라고. 애들을 좋아해서 자식을 5명은 낳을라 했는디. 그때 애기가 있었으면 한국에 갔을지도 몰라. 운명은 잘 모르겠어.”
영임은 삶에 대한 강박관념도, 조바심도 없어보인다. 무언가 손아귀에서 달아날까봐 움켜쥐는 욕정도 없다.
그녀의 마음 속엔 큰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누군가는 그 나무 아래서 잠시 머물다 나무를 향해 손짓하고 떠난다. 나무는 그저 웃는다. 인생에서 보내야 할 풍경을 초연히 바라본다. 그저 하루의 향기가 과거의 날을 잊게 만든다고, 웃는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