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비켜가는 펭귄들 ‘자연의 섭리’를 일깨운다
2015년 04월 13일(월) 00:00 가가
<5> 남극의 동물
거실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천장의 센서와 논 적이 있다. 다리를 들어 까딱하고 움직이면 센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서서히 다리를 들어 올리면 어떨 때엔 센서가 내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다. 센서가 인식하는 은근함의 범위를 정밀하게 재어보며 다리를 일순간 쭉 뻗어보기도 하고 초침처럼 조금씩 미세하게 움직여 보기도 하였다. 어디까지 알아봐주는지 궁금했다. 움직임에 대한 응답이 있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센서만이 내게 응답해줄 때가 있었다.
동물은 움직임에 감응(感應)한다. 세종기지에서는 남극의 동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가끔 젠투펭귄, 턱끈펭귄이 기지에 온다.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잠깐 산책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실험용 바닷물을 뜨러 가거나 해양조사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펭귄을 마주치면 반가워서 그 자리에 한참 머무르기도 한다. 펭귄은 내가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간다. 나와 펭귄은 항상 비껴간다.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걸 인식하기 때문에 비켜가는 것이다. 충돌하거나 투명인간처럼 서로를 스르륵 통과하지 않는다. 펭귄과 나는 서로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켜감도 감응이다.
인간의 작은 영향으로도 남극의 생태계가 교란될 수 있다. 연구 목적 이외에 남극의 생물을 잡거나, 남극의 생물에게 먹이를 주는 등의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모든 생물을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 눈앞에서 남극도둑갈매기 스쿠아에게 새끼펭귄이 잡아먹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얼음 위나 흙 위에 펭귄 발이 남겨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펭귄을 먹는 동물이 유독 펭귄의 발만은 먹지 않고 남겨둔 것이다. 닭발과 비슷한 느낌이다. 펭귄의 발에는 지방층이 거의 없다. 하지만 펭귄은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펭귄의 발을 해부해 보면 동맥과 정맥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동맥에는 심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뜻한 피가 흐른다. 동맥에 있는 따뜻한 피의 열이 가까이 있는 정맥에 바로 전달된다. 체온 유지 측면에서 엄청난 효율이란 생각이 든다.
펭귄 깃털은 다른 새의 깃털보다 짧다. 3∼4cm 정도이다. 펭귄의 몸에는 1㎠ 당 30∼40개나 되는 깃털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깃털은 공기를 품어 열의 손실을 막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이 공기가 물속에서는 문제가 된다. 털 사이 공기층이 펭귄의 몸을 자꾸 뜨게 만드는 것이다. 몸이 뜨면 사냥하는 데에 치명적 결함이 된다. 펭귄은 깃털에 연결된 근육을 사용해서 털을 몸에 붙인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카락 숨을 죽이듯 납작하게 눕힌다. 공기를 빼는 것이다.
펭귄은 부리로 많은 일을 한다. 부리의 역할 중 하나가 꼬리 위에 있는 기름샘에서 기름을 묻혀 몸의 깃털에 고루 바르는 것이다. 부리는 일종의 딱딱한 붓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펭귄이 자꾸 꼬리에 부리를 갖다대며 몸을 부산하게 뒤트는 것처럼 보인다면 깃털에 코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름은 열의 대류와 복사를 막는다. 생체에 단열장치가 있는 셈인데, 이 장치가 고성능이다 보니 가끔 더워하는 경우가 있다. 펭귄은 체온이 너무 올라가면 불필요한 열을 내보내기 위해 가끔 날개짓을 한다. 온도조절하는 게 잘 될 무렵 펭귄은 어른이 된다.
기지 근처 바다에서는 해표도 자주 볼 수 있다. 웨델해표, 레오파드해표, 코끼리해표 등이 킹조지섬에 산다. 그 중 웨델해표는 ‘저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같은 표정을 하고 볕이 잘 드는 평원에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한다. 까맣고 큰 눈과 동그랗게 말린 수염이 특징이다. 이 수염은 먹이를 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염을 머리카락 같은 털의 일종으로 인식한다면 ‘에이 털에 무슨 신경이 있어?’ 하기 쉽지만 해표의 수염에는 신경이 분포하고 있어서 물고기가 꼬리를 까딱만 해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실험에 의하면 수염이 잘린 해표는 수염이 있는 해표에 비해 사냥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우연히 수염이 잘려있는 해표를 찾은 것이기를, 부디 실험을 위해 일부러 자른 게 아니길 바란다.
코끼리해표는 수심 1.6km까지 잠수할 수 있다. 깊은 바다 속에서는 어차피 보이는 게 많지 않다. 시력보다 감지력이 중요하다. 깊은 바다 속까지 잠수하기 위해 해표는 큰 폐를 가지고 있다. 다른 포유동물보다 갈비뼈도 근육도 미오글로빈도 많다. 잠수하기 전 해표는 날숨 동작으로 폐 속의 모든 산소를 제거한다. 그리고 분당 심장박동수를 6∼70회에서 15회까지로 떨어뜨리고 혈액을 뇌로 집중시킨다.
조디악을 타고 바다에 나가면 가끔 유빙 위에서 잠든 해표를 본다. 산소를 몸속에 그득히 저장하고 깊은 바다 속까지 잠수해 들어가 먹이를 사냥한 뒤 수면으로 올라와 유빙 위에서 햇빛을 덮고 잠들었을 것이다. 그 잠에는 원시적인 충족감과 동시에 ‘하루의 섭식’을 마친 생물의 숙연함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해표를 깨울까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애인의 아침잠을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았다.
가끔 자연의 설계에서 섭리를 본다. 그냥 그렇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인과에 틈이 없다. 어쩌다 발견되는 틈도 지금이니까 틈이라 여겨지는 것이지, 더 먼 미래에서는 그 자체가 인과의 일부일지 모른다. 나는 그런 ‘설계’를 발견하고 그것에 감탄하는 일이 재미있다. 호기심이 언제나 나를 추동한다. 재미있다고 여기는 일을 하며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러나 과학은 호기심만으로는 이뤄지지 않고 언제나 검증을 요구한다. 검증의 과정은 지난한 싸움이다. 정확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고, 치열한 논박이 뒤따른다. 그 과정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응답이 필요하다. 나의 의문에 감응하는 세계가 눈앞에 있다. 그것이 내가 지쳐도 즐겁게 달리는 원동력이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 생물연구원〉
펭귄 깃털은 다른 새의 깃털보다 짧다. 3∼4cm 정도이다. 펭귄의 몸에는 1㎠ 당 30∼40개나 되는 깃털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깃털은 공기를 품어 열의 손실을 막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이 공기가 물속에서는 문제가 된다. 털 사이 공기층이 펭귄의 몸을 자꾸 뜨게 만드는 것이다. 몸이 뜨면 사냥하는 데에 치명적 결함이 된다. 펭귄은 깃털에 연결된 근육을 사용해서 털을 몸에 붙인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카락 숨을 죽이듯 납작하게 눕힌다. 공기를 빼는 것이다.
펭귄은 부리로 많은 일을 한다. 부리의 역할 중 하나가 꼬리 위에 있는 기름샘에서 기름을 묻혀 몸의 깃털에 고루 바르는 것이다. 부리는 일종의 딱딱한 붓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펭귄이 자꾸 꼬리에 부리를 갖다대며 몸을 부산하게 뒤트는 것처럼 보인다면 깃털에 코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름은 열의 대류와 복사를 막는다. 생체에 단열장치가 있는 셈인데, 이 장치가 고성능이다 보니 가끔 더워하는 경우가 있다. 펭귄은 체온이 너무 올라가면 불필요한 열을 내보내기 위해 가끔 날개짓을 한다. 온도조절하는 게 잘 될 무렵 펭귄은 어른이 된다.
기지 근처 바다에서는 해표도 자주 볼 수 있다. 웨델해표, 레오파드해표, 코끼리해표 등이 킹조지섬에 산다. 그 중 웨델해표는 ‘저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같은 표정을 하고 볕이 잘 드는 평원에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한다. 까맣고 큰 눈과 동그랗게 말린 수염이 특징이다. 이 수염은 먹이를 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염을 머리카락 같은 털의 일종으로 인식한다면 ‘에이 털에 무슨 신경이 있어?’ 하기 쉽지만 해표의 수염에는 신경이 분포하고 있어서 물고기가 꼬리를 까딱만 해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실험에 의하면 수염이 잘린 해표는 수염이 있는 해표에 비해 사냥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우연히 수염이 잘려있는 해표를 찾은 것이기를, 부디 실험을 위해 일부러 자른 게 아니길 바란다.
코끼리해표는 수심 1.6km까지 잠수할 수 있다. 깊은 바다 속에서는 어차피 보이는 게 많지 않다. 시력보다 감지력이 중요하다. 깊은 바다 속까지 잠수하기 위해 해표는 큰 폐를 가지고 있다. 다른 포유동물보다 갈비뼈도 근육도 미오글로빈도 많다. 잠수하기 전 해표는 날숨 동작으로 폐 속의 모든 산소를 제거한다. 그리고 분당 심장박동수를 6∼70회에서 15회까지로 떨어뜨리고 혈액을 뇌로 집중시킨다.
조디악을 타고 바다에 나가면 가끔 유빙 위에서 잠든 해표를 본다. 산소를 몸속에 그득히 저장하고 깊은 바다 속까지 잠수해 들어가 먹이를 사냥한 뒤 수면으로 올라와 유빙 위에서 햇빛을 덮고 잠들었을 것이다. 그 잠에는 원시적인 충족감과 동시에 ‘하루의 섭식’을 마친 생물의 숙연함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해표를 깨울까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애인의 아침잠을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았다.
가끔 자연의 설계에서 섭리를 본다. 그냥 그렇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인과에 틈이 없다. 어쩌다 발견되는 틈도 지금이니까 틈이라 여겨지는 것이지, 더 먼 미래에서는 그 자체가 인과의 일부일지 모른다. 나는 그런 ‘설계’를 발견하고 그것에 감탄하는 일이 재미있다. 호기심이 언제나 나를 추동한다. 재미있다고 여기는 일을 하며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러나 과학은 호기심만으로는 이뤄지지 않고 언제나 검증을 요구한다. 검증의 과정은 지난한 싸움이다. 정확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고, 치열한 논박이 뒤따른다. 그 과정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응답이 필요하다. 나의 의문에 감응하는 세계가 눈앞에 있다. 그것이 내가 지쳐도 즐겁게 달리는 원동력이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 생물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