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 칩’ 시대, 피지컬 AI의 심장은 한국이다 - 오연석 티에이치이벤처캐피탈 대표
2026년 01월 23일(금) 00:20
전 경기대 교수
2026년, 반도체 시장의 승자는 이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제 세계는 성능과 가격 경쟁을 넘어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묻는다.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는 단순한 부품을 넘어 안보 자산이 되었고, ‘신뢰’는 시장에서 통용되는 새로운 가치이자 통화가 되었다. 이 거대한 지각변동의 중심에 대한민국이 서 있다.

미국의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강화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현미경처럼 검증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등장한 개념이 바로 ‘클린 칩(Clean Chip)’, 즉 신뢰 기반 반도체다. 아무리 싸고 빨라도 출처와 공정, 보안의 무결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 설 수 없다. 한국은 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며 기술력 위에 ‘믿을 수 있는 파트너’라는 독보적 평판을 더했다. 이것은 단순한 브랜드 이미지가 아니라 국가적 생존과 직결된 강력한 진입장벽이다.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 속에서 한국 기업들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점유율 60%를 넘기며 독주 체제를 굳혔고, HBM4 시대로 접어들며 글로벌 고객사들은 한국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설계부터 패키징까지 아우르는 ‘턴키(Turn-key)’ 전략으로 파운드리와 메모리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며 강력한 반등을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승부처는 가상 세계를 넘어 실제 물리 공간에서 작동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의 이동에 있다.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 공장, 국방·의료기기 등 물리적 실체를 가진 AI가 핵심 산업이 되면서 소프트웨어만큼이나 이를 구현할 정밀 부품과 전력 시스템, 그리고 대규모 통합 제조 인프라가 필수적이 되었다. AI가 ‘두뇌’라면 이를 움직일 ‘몸체’가 필요한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는 한국 자동차와 조선 산업의 수준 높은 제조 기술이 피지컬 AI의 핵심 토대가 될 것이라 분석한다. 수만 개의 부품을 정밀하게 통합하는 자동차 시스템 산업과 초대형 구조물에 첨단 제어 기술을 집약하는 조선업의 노하우는 로봇과 스마트 공장의 현실화를 가능케 하는 근육이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부터 정밀기계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생태계를 한 나라 안에 갖춘 유일한 국가다. 부품-소재-장비-완제품이 최단 거리에서 연결되는 이 구조는 설계 변경과 양산 전환의 속도를 결정짓는 피지컬 AI 개발의 결정적 병기다.

최근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현대차와 삼성전자를 직접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칩이라는 ‘뇌’만으로는 미래가 완성되지 않는다. 그 칩이 실제 자동차와 로봇에 들어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려면 세계 최고의 제조 파트너가 필요하다. 젠슨 황이 한국에서 찾은 것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피지컬 AI를 함께 현실로 만들 강력한 ‘제조 동맹’이었다.

신뢰 인프라와 제조 인프라의 결합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더욱 독보적으로 만든다. 삼성의 미국 테일러 공장은 이제 단순한 해외 공장이 아닌 안보 인프라로 평가받고 있으며 유럽과 중동은 기술력과 중립성을 갖춘 한국 기업을 전략적 파트너로 택하고 있다. 물론 공급망 분절화와 거점 생산에 따른 ‘지정학적 인플레이션’으로 비용 부담은 커졌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더 높은 진입 장벽이 되어 살아남은 우리 기업의 지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글로벌 경제가 블록화되는 지금, 미국과 안보 동맹을 유지하며 첨단 제조 역량을 갖춘 나라는 사실상 한국뿐이다. 2025년 반도체 수출 1734억 달러라는 사상 최고치 기록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자동차, 조선, 로봇 등 피지컬 AI 산업이 더해지면 한국 제조업의 성장 스토리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 흐름은 단순한 경기 회복이 아니다. ‘신뢰와 제조 역량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구조적 성장’이다. 2026년, 투자자와 정책 결정자는 성능이나 유행보다 신뢰와 제조 인프라를 동시에 갖춘 기업과 산업을 보아야 한다.

피지컬 AI 시대, 한국 제조업 환경이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이유와 한국 증시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중장기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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