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연구비 0.93%가 의미하는 것- 주윤정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2025년 12월 09일(화) 00:20
한국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GDP 대비 5.0%로 GDP 대비로 보았을 때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현 정부는 윤석열 정부 시기에 있었던 R&D 대규모 삭감을 되돌려 2026년 예산은 35조 3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한다. 그러나 그런 투자 속에서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한 명도 없다. 반면 인문사회 영역에서는 노벨 문학상과 평화상을 받았다. 한 국문학자는 투자 대비 성과로 보면 문학이 가성비가 높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세계는 AI 개발과 사회의 디지털화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 이 기술의 붐이 버블인지 튤립 투기의 재현인지, 아니면 미래의 도래인지 현재로서는 판단이 어렵다. 경제적 성과에 대한 판단과는 별도로 AI로 대표되는 이 기술들은 이미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디지털화는 본질적으로 기억과 지능의 외부화다. 중국의 국가급 학자인 교육학자 쉬지춘은 외재적 기억에 의존하고 내재적 기억을 쌓지 못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장자의 ‘기심(機心)’을 인용하며 기계가 인간의 마음을 잠식하면 인간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진다고 말한다. 교육의 관점에서, 인문의 관점에서, 사회의 관점에서 디지털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심각한 것은 AI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 세계와 만나는 방법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친구나 가족, 의사나 상담사, 성직자나 점쟁이가 아닌 AI에게 먼저 묻는다. 사회적 관계의 양상 자체가 변하고 있다.

AI의 영향은 세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전문가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게 AI는 역량을 상당한 수준으로 증강시킨다. 그러나 훈련과 성장 단계에 있는 청년들이 AI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면 사고력이 현저하게 저하될 수 있고 인간으로서의 의미, 존엄, 효능감 등 인문학적 경험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

게다가 자동화가 도입되면서 미숙련 청년들의 일자리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2025년 10월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청년층(15~29세) 일자리 21만 1천 개가 줄었고 AI 고노출 업종에서 무려 20만 8000 개가 사라졌는데, 이 업종에서 50대의 고용은 오히려 느는 연공편향적 특성이 나타났다. 또한 AI에 대한 투자는 고용 없는 성장, 일자리 없는 공장, 기후위기를 가속화할 전력 수요만 늘릴 수 있다. 어쩌면 기성세대가 AI 활용과 투기적 자본주의를 통해 이익을 추출하는 동안 청년들에게는 ‘느린 IMF’를 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미래에 대한 준비가 AI의 기술력을 높이는 기술 투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회적 충격에 대한 연구와 대응, 회복력을 키우는 준비가 병행되어야 한다. 박정희 시대와 같은 기술과 산업 주도 전략만으로는 21세기의 인구-사회-자연이 얽힌 복합적 위기와 리스크에 대응할 수 없다. 내란을 물리친 21세기 민주국가답게 모두의 번영을 위한 인간과 사회의 준비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역대급 규모인 2026년 R&D에서 한국의 인문사회 연구비 비율은 고작 0.93%이다. EU의 ‘호라이즌 유럽’은 전체 140조원 예산 중 절반이 넘는 약 79조원을 기후변화나 디지털 등 글로벌 난제 해결 분야(필라 2)에 투입한다. 특히 이들 연구 주제(Topics)의 40% 이상을 인문사회 융합 필수 과제로 지정하여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세계에 가치와 표준을 제시하는 인간-사회-기술 공존의 민주적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의 인문사회 연구비 0.93%로는 기후위기,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ASI)의 등장, 국제정치의 격변 등 가속화되는 충격에 대응할 지식과 회복력, 인간과 사회의 마음을 키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상 최대라는 R&D 연구비에서 우리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제대로 된 나무를 키울 수 있는 한 뼘의 땅조차 없는 상황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 키우며 인간과 사회의 더 나은 길을 상상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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