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노래할 수 있는 리더십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5년 05월 20일(화) 00:00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작년 계엄 선포에서부터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 의결, 대통령의 구속과 석방, 서부지법 난동, 탄핵 찬반 시위와 탄핵 결정, 대법원의 신속한 파기환송과 고등법원의 재판 연기, 그리고 국민의힘 후보 교체 파동에 이르기까지 어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분명 이는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들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몇 차례에 걸쳐 경험했던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은 누구도 없다. 한편으로는 한국 민주주의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서 안심도 되지만, 대선 이후에도 사회적 갈등이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도 적지 않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점은 리더십의 문제였다는 점이다.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갑자기 비정상적 상황이 발생하고 작동했다는 사실은 시스템만의 문제로 볼 수 없다.

리더십의 문제에 대한 점검은 이론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만 과거 우리 역사에서 있었던 경험을 통해서도 돌아볼 수 있다. 특히 장기간 집권했던 박정희 정부 시기를 보면 리더십 문제가 잘 드러난다. 18년이라는 기간 동안 집권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은 몇 차례의 변곡점을 거치면서 변화했다.

첫 번째 변곡점은 1969년의 3선 개헌이었다. 3선 개헌을 통해 박정희에게는 더 이상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 김종필의 날개가 꺾인 것이다. 1961년 군사정변에서부터 1964년 6.3사태까지 주한미국대사관은 박정희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김종필의 힘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1963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친 김종필의 외유에는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고, 외유 기간 동안 민주공화당에는 김종필에 반대하는 파벌이 형성되었다.

문제는 김종필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자 더 이상 박정희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1971년 갑자기 발표된 비상사태 선포와 1972년의 유신선포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를 옆에서 제어하거나 의논할 수 있는 한국의 지도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 변곡점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과 1972년 김학렬 경제기획원 부총리의 사망이었다. 김학렬은 박정희의 경제 과외교사로 불릴 정도로 경제정책 분야에서 많은 조언을 했던 인물이었다. 김학렬의 사망 이후 박정희는 더 이상 주변 인물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던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후반부터 주요 경제정책이 관련 부처가 아닌 청와대에서 결정되기 시작했다. 부실기업처리반도, 경부고속도로 추진반도, 군수산업 정책 결정 과정이 모두 청와대로 집중되었다. 한국 거버넌스의 상징이었던 관료제도가 무너지고 대통령만 바라보는 정치화가 시작되었다.

논어 술이편에 ‘공자께서는 사람과 더불어 노래를 불러서 잘하거든 반드시 그로 하여금 반복하게 하시고, 그 후에 그와 합창을 하셨다’(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는 말이 있다. 남의 잘함을 인정하고, 그의 얘기를 듣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었다면, 이번 같은 상황이 일어났을까? 비단 이번만이 아닌 리더십의 문제가 이제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그렇다고 해서 1960년대가 민주적인 시대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자정력을 잃고 귀를 닫은 리더십이 미치는 치명적 결과를 보여준다. ‘아니되옵니다’를 용납하지 못하는 리더십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실시간 핫뉴스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