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전성시대 - 김미은 여론매체부장
2025년 02월 19일(수) 22:00
‘필사’(筆寫)하면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성경이나 불경을 베껴 쓰는 일이다. 이제는 유명작가가 된 이들이 문청 시절 선배 문인의 작품을 일일이 베껴썼다는 이야기도 생각난다. 소설가 조정래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원고지 1만6500장 분량의 ‘태백산맥’을 필사하게 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보성 태백산맥문학관에 가면 조 작가의 육필원고와 아들 며느리, 그리고 전국의 독자들이 쓴 필사본이 전시돼 있다.

최근 필사(筆寫) 열풍이 불고 있다. 20만부 넘게 팔린 유선경 작가의 ‘하루 한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는 ‘모모’, ‘토지’ 등 소설, 시, 산문에서 뽑은 문장을 써 볼 수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 ‘흰’, ‘검은 사슴’을 묶어 한강 스페셜 에디션을 펴낸 문학동네는 필사노트를 세트에 포함시켰다.

시와 소설, 산문 위주로 구성됐던 필사책이 영역을 확장중이다. 계엄 선포 이후 헌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헌법 필사’ 책이 인기다. 5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왼손잡이용 책이 따로 나왔다. 밴드 ‘데이식스’와 아이유, 태연의 노랫말을 따라 쓰는 필사책은 팬들에게 인기가 높다.

흥미로운 건 ‘이집트 상형문자 필사’다. 이집트 문헌학자 유성환 박사가 수천 년 전 고문서에서 골라낸 상형문자 문장을 모았다. ‘나의 심장은 사자보다 강하다’, ‘존재하는 한 그대의 심장을 따르라’, ‘기억에 남는 것은 친절함이다’ 등 50개의 문장을 마치 그림이나 다름 없는 상형문자로 써(그려)볼 수 있다.

창비시선 500번 출간을 기념하는 ‘시로 채우는 내 마음 필사노트’에는 나희덕·황인찬 등 시인이 직접 고른 100편이 실려 있다.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은 가장 좋아하는 필기구로, 책에 실린 진은영의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의 한 대목을 필사해 보았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써내려가다 보니 글귀가 마음에 새겨지는 듯하다.

필사가 문장을 베껴쓰는 데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책읽기와 궁극의 자기 글쓰기로 이어진다면 더 없이 좋겠다.

/김미은 여론매체부장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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