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2024년 12월 27일(금) 00:00
숨진 북한 병사의 품에서 수첩이 하나 나왔다. 우크라이나 특수작전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알려진 병사는 러시아 쿠르스크 전쟁터에서 작은 수첩에 글을 남기며 외로움을 달랜 듯 하다. 수첩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이름은 ‘정경홍’. 수첩에는 편지로 보이는 글도 남겨져 있었다. 다른 군인 ‘송지명’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 편지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하게 표현돼 있었다.

“그리운 조선, 정다운 아버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여기 로씨야(러시아) 땅에서 생일을 맞는 저의 가장 친근한 전투 동지인 송지명 동지가 건강하길 진정으로 바라며 생일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 동지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정경홍은 왜 타국의 전쟁터에서 작은 수첩만 남기고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 그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 전쟁 위기 속에서 젊은 병사의 죽음은 어쩌면 예견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병사 정경홍이 쿠르스크로 파병된 것은 북한 ‘정부의 결정’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과 북한 정권의 판단에 따라 수많은 북한 병사들이 이유도 모른 채 러시아 전역으로 파병됐다.

이처럼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한국의 최고 통치자가 계엄을 선포했을 때 이 땅의 젊은 군인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계엄 당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진입한 계엄군은 대부분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눈빛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총구는 땅을 향해 내렸고 진입을 막는 시민에게 저항도 하지 않았다. 국회의사당을 가로막고 있던 국회 관계자 중 상당수는 계엄군의 등장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슬픔으로 가득했다.

최근 국회와 헌법재판소 등이 계엄의 잘잘못을 따지면서 정국이 혼란스럽다. 이런 과정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잘못된 정치적 판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소식을 전해야 하고, 또한 그 편지를 부치지도 못하는 비극이 반복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kro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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