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군인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는데 -권정생 글, 이성표 그림 ‘장군님과 농부’
2024년 12월 25일(수) 21:30 가가
단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아니, 바뀔 뻔했다. 그들의 뜻대로 세상이 바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980년 광주가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들은 정말로 서울 한복판에서 정치인을 구금하고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자 했을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더라도.
뒤이어 드러난 사실은 앞선 질문을 강하게 긍정하게끔 한다. 경고성 계엄이었다는 궤변은 허술한 거짓말임이 확연해졌다. 어깨에 별을 단 장군들이 이 일에 연루되었고 그들 휘하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하에 작전을 개시했다. 불법 비상계엄이 몇 시간 만에 해제된 것은 시민과 역사가 함께 만든 천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군인은 나라를 지킨다. 나라를 지킨다는 건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날 이후 국민은 이른바 ‘내란통’이라 불리는 우울감과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군대가 우리의 안전을 해칠 수 있음을 다시금 목격한 것이다. 그날 이후 환율과 주식은 요동치고 국가 경제의 안정성은 크게 흔들렸으며 세밑 경기는 한껏 위축됐다. 대한민국 군대가 우리의 재산을 지키기는커녕 위협이 된다는 사실도 새로 깨닫는 나날이다.
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국방부 장관 김용현과 내란 수괴 윤석열의 명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고백인데, 그들이 벌인 범행의 경중은 수사로 밝혀질 일이지만, 그들이 반란군에 되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는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
국회와 수사기관에 출석하는 장군들의 모습은 실로 씁쓸했다. 그들이 입은 제복에 박힌 별은 더는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은 입을 맞춘 듯 거짓말을 했고 제대한 민간인과 내통했으며, 국가와 국민보다는 개인의 진급과 출세를 우선하였다. 북한을 도발해 전쟁을 일으키려 하였다. 계엄을 통해 행정부와 사법부는 물론 입법부마저 접수하려고 했다. 과연 실제 전쟁이 난다면 누가 우리 군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의 비극 속에 믿을 건 국군뿐일 텐데, 그들은 국민을 보란 듯이 배신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짐작하기 어렵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014년 12월 3일까지의 시간보다 더 걸릴지도 모른다.
권정생의 그림책 ‘장군님과 농부’에서 장군님 또한 못 믿을 군인이다. 그는 적군에게 포위당한 부대에서 겨우 홀로 살아남는다. 배가 고픈 그는 민간인 농부에게 몸을 의탁한다. 그의 식량을 축내고 그의 집에서 잠을 청한다. 그리고 적이 농부의 집 가까이에 다다르자, 농부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끝내 자신을 보위하고 살필 수족이 장군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농부 할아버지는 끝까지 장군을 믿는다. 장군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동안 그는 식량을 구하고 짐을 떠맡고 쉴 곳을 마련하며 뗏목을 만든다. 장군은 여전히 명령을 내릴 뿐이다. 그러고는 전쟁이 끝나면 훈장을 주겠노라, 농부에게 엄숙하게 약속한다. 어느덧 장군과 농부는 역할이 바뀐 듯하다. 농부는 장군을 결연히 지키고, 장군은 농부에게 깊이 의탁하는 것이다.
굳이 그림책에서 장군의 최후까지 소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실의 장군들이 그 결말을 알려줄 테니까. 농부는 어떨까. 농부는 사람들과 함께한다. 사람들은 쉴 새 없는 노동으로 거칠고 못이 박힌 그의 손을 보고, 농부 할아버지야말로 장군님이라 말한다. 하나 농부는 그럴 마음이 없다. 자신은 장군이 될 수도 없고, 장군이 되는 것도 싫다고 한다. 그는 농부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일 테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여의도에 모여 탄핵을 외치고 남태령에 모여 농민들과 함께하고 이제 광화문과 총리 관저와 헌재 앞에 모일 시민도 장군이 될 마음이 없다. 우리는 그저 시민으로 존재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나라 군대가 우리를 보호할 것이라 믿으며, 그 믿음 아래에서 민주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주권자가 원하는 보통의 삶이다. 이 보통의 삶을 방해한 자는 누구인가? 어서 손을 들고 심판을 달게 받길 바란다. <시인>
1980년 광주가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들은 정말로 서울 한복판에서 정치인을 구금하고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자 했을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더라도.
군인은 나라를 지킨다. 나라를 지킨다는 건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날 이후 국민은 이른바 ‘내란통’이라 불리는 우울감과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군대가 우리의 안전을 해칠 수 있음을 다시금 목격한 것이다. 그날 이후 환율과 주식은 요동치고 국가 경제의 안정성은 크게 흔들렸으며 세밑 경기는 한껏 위축됐다. 대한민국 군대가 우리의 재산을 지키기는커녕 위협이 된다는 사실도 새로 깨닫는 나날이다.
권정생의 그림책 ‘장군님과 농부’에서 장군님 또한 못 믿을 군인이다. 그는 적군에게 포위당한 부대에서 겨우 홀로 살아남는다. 배가 고픈 그는 민간인 농부에게 몸을 의탁한다. 그의 식량을 축내고 그의 집에서 잠을 청한다. 그리고 적이 농부의 집 가까이에 다다르자, 농부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끝내 자신을 보위하고 살필 수족이 장군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농부 할아버지는 끝까지 장군을 믿는다. 장군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동안 그는 식량을 구하고 짐을 떠맡고 쉴 곳을 마련하며 뗏목을 만든다. 장군은 여전히 명령을 내릴 뿐이다. 그러고는 전쟁이 끝나면 훈장을 주겠노라, 농부에게 엄숙하게 약속한다. 어느덧 장군과 농부는 역할이 바뀐 듯하다. 농부는 장군을 결연히 지키고, 장군은 농부에게 깊이 의탁하는 것이다.
굳이 그림책에서 장군의 최후까지 소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실의 장군들이 그 결말을 알려줄 테니까. 농부는 어떨까. 농부는 사람들과 함께한다. 사람들은 쉴 새 없는 노동으로 거칠고 못이 박힌 그의 손을 보고, 농부 할아버지야말로 장군님이라 말한다. 하나 농부는 그럴 마음이 없다. 자신은 장군이 될 수도 없고, 장군이 되는 것도 싫다고 한다. 그는 농부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일 테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여의도에 모여 탄핵을 외치고 남태령에 모여 농민들과 함께하고 이제 광화문과 총리 관저와 헌재 앞에 모일 시민도 장군이 될 마음이 없다. 우리는 그저 시민으로 존재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나라 군대가 우리를 보호할 것이라 믿으며, 그 믿음 아래에서 민주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주권자가 원하는 보통의 삶이다. 이 보통의 삶을 방해한 자는 누구인가? 어서 손을 들고 심판을 달게 받길 바란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