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깃발과 응원봉
2024년 12월 11일(수) 22:00
대통령의 폭거에 시민들이 나선 전국의 집회장 풍경이 화제다. 과거의 직능, 운동단체 깃발보다 개인의 재치 있는 작품들이 사람들을 웃기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전국 집에서 누워있는 사람들의 모임, 고양이를 사랑하는 모임, 라면 한번에 두 개 먹기 모임... 물론 실재하지 않는 모임이다. 엄중한 시국이지만 때로는 유머로 대응하는 변화하는 시민정신의 한 단면이다. 나는 ‘전국 막걸리 웃국만 마시는 모임’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sns에 밝혔다가 친구들에게 엄청 ‘까였’다. 막걸리 근본도 모른다느니, 탁주는 탁해야 진짜라느니, 돈 많아서 그러느냐느니 하는 농담성 지탄이었다. 참고로, 웃국이란 막걸리를 가라앉혀 맑은 부분만 따라 먹는 것이다. 나는 해남의 양조장에서 처음 마셔본 후 습관이 되었다. 물론 나중에는 가라앉은 탁주도 다 마셔버리지만.

군대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 난입하고 계엄을 날리는 이 황당한 상황에도 우리는 싸우면서 웃음을 잃지 않겠다는 결의가 넘친다. 그래서 힘든 싸움을 시민들이 유쾌하게 이겨내고 있는 듯하다.

집회에서 보이는 또 다른 변화는 촛불은 옛것이 되고, 케이팝 팬들이 주로 쓰는 응원봉이 대세가 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새로운 세대의 발언 강도는 높았다. 탄핵 투표를 포기한 의원에게 적극적이고 강력한 항의를 주도한 것도 새 세대이고, 대학생들의 결의도 대단했다. 젊은 세대가 탈정치적이라는 우려를 해온 기성세대들이 깜짝 놀랄 일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걸까. 그런 반성의 밀물이 한국 사회를 채웠다. 방식이 달랐을 뿐이었다. 학업과 힘든 취업에 지친 절망하던 세대의 봇물 터진 호소가 집회를 메웠다. 물론 그들 젊은 세대들도 집회장에서는 ‘올드한’ 어묵탕 국물을 좋아했지만 말이다.

내가 특별히 감동받은 건, 이른바 선결제 미담이다. 시민들이 카페와 식당 등에 돈을 미리 결제하고 시위하는 누구나 필요하면 그 음식을 요청해 먹는 문화다. 이것이 아직은 문화라고 부르기엔 단발적인 사건이지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연대감과 따뜻한 정서에서 나온 새 문화가 될 것이라 본다.

사실, 이런 부조 문화는 우리에게 존재했다. 군인이나 청년들이 밥을 먹는 식당에서 누군가 미리 밥값을 내고 간다던가, 결식하는 아이들을 위해 식당에서 무료로 밥을 낸다던가 하는. 나도 젊어서 언젠가 어떤 어른들에게 음식을 얻어먹은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도 다 옛날 ‘좋았던 시절’의 한 자락 미담이라 치부했었다. 이제는 그걸 옛날 이야기로 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씁쓸하게도 탄핵정국이 가져다 준 민족 정서의 재발견이다. 어찌 되었거나 너무도 감사하고 울컥한 감동의 릴레이다. 이번 주에도 선결제는 이어지고 있다. 더운 커피 한 잔 마시고, 한두 잔 값을 미리 내는 행렬이 이어진다. 이 추위에도 뜨거운 마음 덕에 속이 훈훈하다. 아, 대한민국이여.

이탈리아에는 예전부터 ‘카페 소스페사(caffe sospesa)’라는 시민 덕성이 있다.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신 시민이 누군가를 위해 한두 잔 분의 요금을 같이 내는 거다. 즉, 선결제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커피값이 없는 가난한 이에게 자격이 있다. 작은 자선은 사회의 느슨해진 감정들을 일깨우고, 올이 풀린 연대감을 다시 깁게 만든다. 커다란 돈과 정부의 시책이 아니라 이런 시민의 자발적 정신이 더 크게 작동한다. 부자도 아닌, 그저 주머니가 팍팍한 서민이 그 선결제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눈물겹고 찡한 파동이 가슴을 친다.

올 겨울, 이 온도 높은 선함을 대하고 있지만 곧 사태가 끝나더라도 한 시민문화로 남았으면 한다. 아직 우리 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도 많다. 다시 오늘도 집회장으로 시민들이 모인다.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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